채식의 날
백수가 되고 나서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자취 경력 십여 년, 그간 요리를 전혀 안 하지는 않았지만 재미를 찾은 것은 새로울만하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그저 나를 돌보는 일에 집중하자 마음먹고서 생긴 변화다. 신생아를 키우듯 매일 나를 잘 먹이고 잘 씻기고 잘 재우는 일이 내 삶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나를 잘 먹이지 못했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팔 할을 회사에 놓아두고 집에 오면 이 할을 집안일에 나눠 써야 하는데, 그 이 할을 다시 쪼개고 쪼개다 보면 먹을 에너지는 있어도 먹일 에너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차려주는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을 때는 생각하지 못한 에너지의 쓰임이다. 그때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데 에너지를 썼던 것 같은데. (어머니,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어쨌든 다음날 다시 회사에 가져다 놓을 에너지를 만들려면 뭘 먹기는 먹어야겠고, 결국 결론은 레토르트 식품 또는 배달 음식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바닥난 연료통에 주유하듯 식사를 하고 나면 배가 불러도 허기가 졌다.
퇴사를 하고 처음에는 남아도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집안일에 열을 올렸다. 대청소를 하고, 가구 위치를 바꾸고, 안 쓰는 물건들을 처분하고, 수납과 정리를 새로이 하고, 이것들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주방 수납을 세 번 정도 갈아엎었을 때쯤 요리에 대한 욕구가 피어올랐는데, 그때 나는 이미 넷플릭스에서 음식 관련 다큐멘터리들을 섭렵하고 유튜브에서 국적 불문 요리 콘텐츠를 무한 시청한 상태였다. 아마도 나는 내가 인식한 시점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나를 잘 먹이는 일에 꽤나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너는 먹기 위해 살아, 살기 위해 먹어?’ 친구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시답지 않지 않다. 둘 다이지 않을까?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다. 그리고 먹인다. 나를 먹이기 위해 살고, 나를 살리기 위해 나를 먹인다. 인류 역사의 가장 획기적 사건인 불의 발견이 곧 요리의 시작이었고 문명의 기원이었으니, 스스로 요리한 음식을 스스로에게 먹인다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행위가 아닐까 싶다.
몇 해 전부터 채식을 지향한 것은 요리 욕구를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공장식 축산업이 일으키는 환경오염과 동물 학대에 대해 알고 나서부터는 자칭 육식주의자였던 시절만큼 고기를 먹는 것이 즐겁지 않다. (물론 고기를 한 점이라도 더 먹이려는 엄마의 노력을 거부할 정성까지는 없지만.)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 flexible vegetarian)이 되기로 결심하고 나서 처음 시도한 것은 일주일 중 6일은 일반식, 1일은 비건(vegan: 완전 채식)을 하는 것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동료들과 단체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채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초심자로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은 것이었다. 채소 요리법과 식품 성분표를 정독하는 데 흥미를 붙이고 나서는 집에서 나를 먹일 때만큼은 채식을 지향하는 것으로 원칙을 바꿨다. 퇴사를 하고서는 집에서 나를 먹이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채식의 비중이 커졌다.
단지 육식의 죄책감을 더는 것만이 채식의 장점은 아니다. 예전에는 잘 몰랐던 갖가지 채소와 버섯의 맛을 깨우친 것은 큰 기쁨이다. 또한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면서 소화 불량이 줄어들었고 하체 부종도 많이 사라졌다. 엄마는 만날 때마다 내가 전보다 말랐다며 소스라치지만 나는 내가 근 몇 년 중 가장 신체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안다. (엄마는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나는 최근 나를 제법 잘 먹여왔다. 1년 넘게 ‘어글리어스’라는 플랫폼을 이용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상품성이 떨어진 못난이 농산물들이 폐기될 위기에서 구출돼 내게로 온다. 내 삶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하면서 농업과 환경의 지속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다니! 나빠져만 가는 세상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죄스러운 요즘, 채식을 지향하는 것은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나를 먹이는 일은 그러니까 삶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먹는가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알려준다. 내게 무엇을 어떻게 먹이는가는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바대로 꾸려가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렇다 보니 어떨 때는 재미와 보람이 차오르다가도 어떨 때는 하염없이 귀찮고 고되다. 최우선 과제라 해놓고는 매일 밀려드는 퀘스트 같아서 지겨울 때도 많다. 그때란 보통 내가 싫어질 때나 세상이 싫어질 때, 혹은 나도 싫고 세상도 싫을 때. 대륙 너머 수천수만 명이 죽고 다쳐도 나는 오늘 뭘 먹을지 생각해야만 함에 깜짝 놀라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이래도 밥 차려 먹을 거야? 이래도? 이래도?‘ 뒷덜미를 잡아끄는 괴물 같은 절망을 매단 채로 기어이 나를 먹이고야 말 때, 나는 먹기 위해 사는 동시에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니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은 최상급 자기애의 (때로는 이기심의) 발현이다.
요 며칠 나를 잘 먹이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