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95, 축가 고르기
"축가로 원하는 노래 있으면 뭐든 말해봐."
가창력, 무대 센스, 유머와 외모까지 축가 무대를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선배들을 섭외했다며, 노래의 장르나 난이도는 상관없다며, 남자친구는 나에게 원하는 곡은 뭐든지 이야기하라고 했다.
사실 그동안 결혼 준비를 하면서 나의 개인적인 선호보다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들이 꽤 많았다.
예산, 양가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의 의견, (특히 나에게는 가장 많이 신경 쓰였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 그리고 최근에는 평생의 로망이었으나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해외 신혼여행과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사회적 거리두기 등 마음먹은 대로 쉽게 풀리지 않는 여러 환경들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대신 적당히 합리적으로 괜찮은 것으로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른 사람들이 적당히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최소한 남들만큼은 하는 것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았다. 때로는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며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에 맞춰 보수적으로 행동할지, 아니면 상황이 좋아질 것에 과감히 베팅할 것인지 갈팡질팡 헤매곤 했다.
하지만 축가에서만큼은 오로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할 수 있다니. 오랜만에 결혼과 관련된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집까지 1시간은 족히 걸리는 퇴근길, 플레이리스트를 축가 추천곡들로 빼곡히 채우고 한 곡씩 듣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유튜브에서 "축가 추천"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곡들, 또는 "축가"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바로 그 곡들이었다.
플레이리스트의 가장 첫 번째 곡을 듣는 순간, 마스크 너머로 배시시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감미로운 목소리와 부드러운 멜로디가 버스 맨 뒷좌석을 따뜻하게 감싸안는 것 같았다. 그동안 결혼을 준비하며 알게 모르게 받았던 스트레스, 회사에서도 나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좋은 성과를 내고 싶다는 욕심, 이제는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 한 켠의 부담감들이 그저 좋은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멜로디 너머로 가사가 들렸을 때에는 그 따뜻함과 달달함은 배가 되었다.
거기 있어줘서 그게 너라서
가끔 내 어깨에 가만히 기대주어서
나는 있잖아 정말 빈틈없이 행복해
- 성시경, 너의 모든 순간
당시 이 곡이 OST로 쓰였던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만났던 장면이 떠올랐고, 가사 내용은 그대로 그림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빈틈없이 행복하고 남김없이 고맙다"라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진심만큼은 온전히 마음으로 전해지는 놀라운 가사는 단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마음과 귀를 쫑긋 열고 듣게 만들었다.
이외에도 폴킴의 '너를 만나', 한동근의 '그대라는 사치', 이석훈의 '그대를 사랑하는 10가지 이유' 등 결혼식 축가 Best 5, 후회 없는 축가 TOP 5와 같은 추천곡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들을 하나하나 들으며 행복에 잠겼다. 마치 처음부터 축가로 불리기 위해 쓰인 것처럼 가사 하나하나가 주옥같이 소중하고 따뜻했기에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지쳐 있던 마음이 충분히 위로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이 곡들 중에서 축가를 고르려고 하니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미 내가 갔던 다른 결혼식에서 최소 한두 번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들이었기에, 한 번뿐인 나의 결혼식에서는 조금 더 특별하고 흔치 않은 곡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나의 결혼식 축가에는 내가 꿈꾸는 사랑, 내가 바라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결혼 이후 매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마음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잔잔하고 조용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랑의 모습을 담은 노래.
그대 내게 올 때
백마 타고 오지 않아도
그대 내게 올 때
반짝이는 선물 없어도
그대 내게 올 때
날 알아보는 눈빛 하나로
그걸로 나는 충분해요
- 커피소년, 그대 내게 올 때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겉모습,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선물, 내가 더 멋진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거추장스럽게 꾸며내는 포장이 없어도, 서로를 알아보는 눈빛과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가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 스스로 상대방의 외면이 아닌 내면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것만으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상대방도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요구하는 조건부 사랑이 아닌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주는 사랑을 바랐던, 우리의 첫 시작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결혼 생활도 이 노래와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이 행복한 연애의 연장선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성대한 가족 행사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대출 상환과 육아라는 쉽지 않은 현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있어 결혼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서로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모든 걸 가졌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넉넉하게 시작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 비싼 호텔 결혼식과 신혼집을 자가로 시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부러운 마음, 소중한 사람들의 결혼식에 가서도 드레스와 부케와 꽃장식들을 보며 가격을 매기는 속물적인 마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될 대로 되라며 포기하고 싶었던 절박한 마음.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그동안의 부끄러운 마음들을 솔직하게 마주하였고, 그 마음들을 천천히 다독이며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 기억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백마와 반짝이는 선물" 대신, 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소중한 "날 알아보는 너의 눈빛"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직장인이 되어서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머리뿐"이라던 우리 동네 미용실 사장님의 명언처럼, 축가는 결혼을 준비하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다른 것에 대한 부담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점에서, 축가 고르기는 그동안 받았던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행복한 선물이었다.
그러나 축가를 고르는 시간이 의미 있고 소중했던 더 큰 이유는 결혼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부부란, 사랑이란, 평생 함께 한다는 것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서 매일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 축가를 통해 다시 한번 그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식이라는 특별한 자리에서, 지금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앞으로 매일매일 자신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기를 결단하는 그 자리에서,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불러주는 축가를 통해 우리는 한번 더 기억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너의 마음 하나로
그걸로 나는 충분하다는 것을.
[출처]
커버 사진 https://unsplash.com/photos/UF2-gL3q-38
'그대 내게 올 때' 음원 https://youtu.be/vrN7YuDDxjQ
그대 내게 올 때
백마 타고 오지 않아도
그대 내게 올 때
반짝이는 선물 없어도
그대 내게 올 때
날 알아보는 눈빛 하나로
그걸로 나는 충분해요
남은 된장찌개 먹어도
함께 버스 타고 다녀도
들꽃 따다 안겨줘도 나는 좋아요
변치 않는 그대 있다면
나만 사랑하는 그대라면
나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인걸요
(...)
그대 내게 올 때
거추장스런 이름 없어도
그대 내게 올 때
억지스런 부푼 꿈 없어도
그대 내게 올 때
날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그걸로 나는 충분해요
- 커피소년, 그대 내게 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