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하지 않은 동네 사랑방
환대에 대해 적어보기로 했는데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추상적인 개념을 정리하려면 역시 레퍼런스가 최고! 꼭 십분의일과 비슷하진 않아도 방문했을 때 자신만의 방식으로 환대를 잘하고 있는 곳들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을지로 주변의 가게들이 될 것 같다. 그 첫 번째 장소는 을지로의 작은 에스프레소바 <더 데일리카페인 을지로>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머릿속에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걱정이 든다. 이렇게 쓰다 보면 결국 잘 써야 생생정보통류의 맛집 소개글 (그렇다면 과연 그의 에스프레소에는 어떤 맛이..?)로 전락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어쩐지 그런 건 굳이 여기에 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나는 몇 해 전에 면세끼라는 이름의 인스타계정을 만들고 면플루언서를 꿈꾸며 국수 가게들을 올린 적이 있는데, 팔로우 수가 전혀 늘지 않아 완전히 망한 이력이 있다. 당시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맛집 포스팅 같은 건 가급적 지양하고 싶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다 완전한 주관적 시선으로 주절주절 좋아하는 곳들의 관찰기를 써보기로 했다. 원래 쓰려던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 하면 이곳만의 장점은 무엇 무엇이며 여기엔 이런 환대가 있더라~분석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기를 쓰듯 어떤 가게에 가서 보고 느낀 것을 늘어놓겠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가볍고 경쾌하게 써서 읽는 사람이 쭉 읽다가 그래서 여기엔 무슨 환대를 한다고...? 본래 읽게 된 목적까지 헷갈려하다가 다시 훑어보고서야 아... 그렇구나... 그런가? 싶은 글을 써보려 한다.
어쩌다 보니 책의 서문 같은 글을 쓰고 말았다. 본의 아니게 이번 화의 주인공인 <더 데일리카페인 을지로>의 분량이 조금 줄어들 것 같다. 나로서는 다행이지만 데일리카페 사장님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부디 사장님이 자신의 카페를 네이버에 검색해보지 않으시길 바란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을지로 에스프레소 바에 대한 이야기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를 처음 가게 된 건 순전히 나와 동선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예전에 쓰던 작업실 바로 옆 건물인 데다가가 거기서 나와서 십분의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카페가 거의 통창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나가다 보면 자주 사장님과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안면이 생긴 이후로는 사장님이 늘 어어... 어디가? 안 들어올 거야? 이런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래도 세 번에 한 번은 들어가는 게 예의인 그런 카페였다.
사실 나는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 번에 많이 마시지는 못하는 좀 독특한 케이스다. 그러니까 스벅에서 아메리카노 톨사이즈를 시켜도 절반 정도 마시다 보면 굳이 더 안 마시고 버리게 되는 그런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굳이 5천 원 돈을 주고 한 잔 가득 담기는 그런 커피를 사마기엔 어딘지 돈이 아깝다. 그런데 이런 에스프레소 바에선 보통 한잔에 2-3천 원으로 누가 먹고 먹다 남긴 것만큼의 양만 주니 내 커피 취식 스타일과 딱 맞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에스프레소에 대해선 완전히 문외한이지만 에스프레소와 결이 맞아버려 가끔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돌아가서 그 데일리.. 커피집에 대해 얘기하자면 일단 가격이 좋다. 에스프레소니까 양이 적은 만큼 가격이 좋지 않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한 번의 반격을 하자면 원두 가격도 싸다. 200g 기준 보통 14,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니 생두 가격이 폭등한 요즘 시세로 생각하면 꽤 저렴한 편이다. 그리고 맛도 좋다. 나는 당연히 집에 커피 머신이 없어서 원두를 살 일이 없는데?라고 한다면 정말로 할 말이 없지만 가격이 좋은 것은 확실하다. (*매장 메뉴판에는 아메리카노가 없어 몰랐는데 네이버에서 보니 에소가 아닌 아메리카노도 2,750원에 판매하는 걸로 나와있다. 어쩐지 오늘 사람들이 와서 자꾸 에소가 아닌 아아를 시키더라니... 역시 인터넷을 생활화해야 된다.)
물론 이런 바의 특성상 가격보다 중요한 건 바에 서있는 사람이다. 더구나 여긴 전부 스탠딩이기 때문에 일부러 뒤를 돌아 벽을 보지 않은 한 바에 있는 사장님과 마주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고 보니 뒤에도 거울이 있다) 사장님이 그야말로 을지로의 박찬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헤비토커기 때문에 일단 마주할 각오가 되어있다면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단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 대개 그렇듯 사장님 역시 상당히 박학다신 하신 분이다 (당연히 사장님의 경우 커피) 그리고 그걸 아낌없이 공유해 주신다. 한 번은 나도 카페를 차려볼까.. 이런 친구를 데려온 적이 있다. 그날 그 친구는 카페 시장 전반에 대한 사장님의 설명을 듣다가 커피를 연달아 3잔이나 마시는 바람에, 나갈 때는 가볍게 손을 떨면서 나왔다. 아마 일주일에 한 번씩만 와도 한 달이면 대학에서 "커피의 이해" 같은 과목을 한 학기 수강하는 효과가 나지 않을까 싶다.
그런 탓에 매장엔 동네 사람들을 비롯해 근처 대학생, 직장인 등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령대의 손님이 북적인다. 대개 사장님은 니가 무슨 주제를 꺼내든 나는 받아칠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프로 야구 타석에 선 타자의 기세로 서 있으시기 때문에 오는 사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장님과 어떤 말을 섞게 되고 만다. 오늘은 환경동아리 학생들에게 플라스틱이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해? 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계셨는데 환경 전공자라는 학생들조차 사장님의 기세에 눌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또 하나 특이한 점. 을지로에 있는 카페치고는 내부 인테리어나 전체적인 미감에 전혀 신경 쓰지 않은 곳이다. 오직 커피의 맛과 사장님 본인의 개인기로 을지로 커피시장을 한번 뚫어보겠다는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 동네 노포 사랑방의 느낌이 물씬 난다. 아무래도 동네 사랑방이 너무 으리으리하면 부담스러우니까.
어딘지 이렇게 마무리하면 왠지 사장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드니 한 가지 에피소드를 추가하고자 한다.
한 번은 지방에서 온 친구들을 데려온 적이 있는데 친구 중 한 명이 매장에서 판매 중인 모카포트를 구매할까 고민하니 사장님이 말했다.
"사지 마세요. 여기서 사는 것보다 쿠팡이 더 싸요."
사장님의 멘트에 감동한 친구들은 당연히 모카포트를 사진 않았지만 대신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얼마나 쿨하고 멋진 곳인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준 사장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다음에는 사장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장소를 리뷰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