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ai가 할 수 없는 것
전생인가 싶을 정도로 까마득하긴 하지만 한 때 십분의일도 회사 형태로 운영되던 시절이 있었다. 2017년 2호점을 오픈하고 2019년 3호점인 '아무렴 제주'를 오픈하기 직전 만들었던 것 같다. 정확한 설립 시점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내가 그때 공방에서 멋진 도자기를 하나 만들었었는데 그게 아마 2018년이이었지... 정도의 무게감이지만 분명 주식회사 법인을 설립하고 대표 자리에 이름을 써넣었었다. 이후 딱히 달라진 건 없고 법인세 납부라는 새로운 업무가 추가됐던 기억이 난다. 세무사와의 추억만 늘어났다.
어쨌든 우리는 서류 상으로는 좀 더 어엿한 조직이라는 꼴을 갖추게 됐고 그 기분에 맞춰 월간회의 때 잠시 안하던 것을 하게 됐는데, 그 중 하나가 사업 아이템 제시였다. 회사로서 미래 먹거리를 논의하자, 는 것이었다. 그 때 내가 야심차게 들이밀었던 아이템이 북카페였다. 모처럼 지나간 추억을 소환한 이유 오늘 소개하고 싶은 공간이 바로 서촌의 북카페 <북살롱 텍스트북>이기 때문이다.
'북카페'라는 단어부터가 약간의 모호함을 내포한다. 그래서 여긴 책방인가 카페인가. 법인 설립만큼이나 신비로운 추억이지만 한때 공간에 대한 강의를 하고 다닐 때가 있었다. 그 때 유독 힘주어 했던 말이 한 공간에서는 하나만 팔아라 였다. 그런데 북카페는 무엇인가.
곳곳에 쌓여있는 책을 뒤적거리며 (서점에서도 할 수 있지만 오래 있기엔 다리도 아프고 피곤하다),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어차피 오늘 카페를 가려고 했다면), 웬만한 카페보다는 조용하고 차분해서 일을 하거나 작게 이야기나누기 좋다. 눈치챘겠지만 여기는 어른들을 위한 일종의 놀이터다. 집에서 뛰어놀 수 없으니 밖으로 나와 시소와 미끄럼틀을 탔던 오래 전 추억을 이제 커피와 책을 손에 쥐고 놀고 있는 것이다.
올드한 어감탓인지 웬만한 북카페들이 다 망해 버린 탓인지 요즘 북카페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진화했다. 망원동 <책바>의 성공으로 우후죽순 생겨난 술과 책이 있는 북바, <블루도어북스> (구 도하서림) 처럼 리미티드 책과 웰컴티를 제공하고 시간 예약으로 운영되는... 여기를 어떻게 불러야할까 복합..문화공간?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마다의 특색을 갖췄다.
<북살롱 텍스트북> 역시 그냥 북카페로 부르기엔 미안한 공간이다. 빈티지한 가구와 편안한 음악, 정체성에 걸맞게 구성된 완벽한 책 큐레이션. 책이 아주 많진 않지만 읽고 싶은 책, 손이 가는 책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런 곳은 공간 자체로 기능한다. 커피나 와인의 맛이 메인이 아니기에 ~해야한다는 식의 F&B의 공식은 무색해진다. 스타벅스의 커피값 4,700원에도 몸서리치고 메가커피조차 잘 가지 않은 나 역시 별다른 고민없이 서촌의 많은 카페들을 제치고 오늘 이곳으로 왔다. 오늘은 대화하기 좋은 공간이 필요했으니까. 커피는 보통의 맛이었고, 가격은 7,000원이었다. 계산은 친구가 했다.
오래 전 내가 투자자들에게 IR자료를 제출하는 마음으로 밀었던 북카페 아이템은 수익을 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까였다. 휴가 차 다녀온 LA와 포틀랜드의 오래 된 서점 사진까지 레퍼런스라는 이름으로 슬쩍 끼워넣었지만 눈치 빠른 멤버 몇이 바로 제동을 걸었다. 어허...와인으로 돈 좀 벌었다고 조직의 돈을 날로 가져가려해? 얄팍한 사대주의로 설득하기엔 이미 다들 머리가 굵어진 것이었다.
북살롱의 매출이 궁금해진다. 함부로 짐작할수는 없지만 비교적 한산했던 작년에 비해 오늘은 평일 오후임에도 자리가 없었다. 기성 작가분들도 꾸준히 방문하는 것 같았다. ai의 물결이 높아질수록 그 파도를 타기 온전히 힘든 사람들은 ai가 할 수 없는 일을 찾는다. 컨셉이 확실한 오프라인 공간을 만드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인간에게는 몸이 있다" 라고 유발 하라리 선생님이 말했듯, 디지털 공간이 아무리 확장되어도 사람들은 종종 우리의 몸을 편안히 둘 매력적인 공간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