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에세이6
본의 아니게 또 오이 에세이를 올리게 됐다.
무언가를 잘 버리지 못하는 지병이 있다. 처음 매장을 만들 때 워낙 돈이 없어 이것저것 주워와 인테리어를 한 탓인지 감출 수 없는 중고나라 근성이 생긴 탓이기도 하다. 옷을 구매하고 뗀 택도 쉽게 못 버리는 편이니 밭에서 직접 딴 것들이야 오죽했을까. 예를 들면 오이 같은... 제때 수확하지 못해 거의 노각화된 오이가 몇 개 있었는데 그마저도 바로 먹지 못해 완전히 물러버렸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음식쓰레기로 처리해 내다 버렸어야 했으나 직접 기른 오이를 쓰레기봉투에 차마 집어넣질 못했다. 그래서 그 오이를 그냥 마당의 화분 위에 올려뒀던 것이다. 쓰다 보니 그냥 쓰레기 투기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옥탑의 주인인 C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다. 지금부터는 다시 자신감을 갖고 그로 인한 작은 기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투기꾼에 의해 버려진 노각은 장마가 끝난 8월의 태양 속에서 바짝바짝 마르더니 급기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렇게 마지막 오이는 점점 잊히는가 했는데... 어느 날 그 미라 같은 것 틈에서 싹이 올라왔다. 처음엔 잡초인가 싶었는데 뾰족하고 빳빳한 것이 다른 잡풀들과는 근본이 달랐다. 몇 달 키워봤다고 안면이 트인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을 찍어 확인해 보니 네이버 스마트렌즈도 오이임을 확인해 줬다. 친자 확인이라도 받은 마음이었다. 일전에 제멋대로 엉켜 허덕이는 오이 덩굴을 다듬어주며 사람이 손을 대지 않던 시절엔 어떻게 살았지? 싶었는데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대단한 놈들..
두어 장의 잎으로 시작한 오이는 내 인스타그램 업로드 속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틀 만에 수십 개의 씨앗을 발아시켰다. 고작 스토리 업로드보다 발아가 더 빨랐던 것이다... 자연은 일정한 속도로 도로를 주파하는 마라토너와 같아서 잠시도 쉬지 않고 묵묵한 속도로 자신의 일을 해낸다. 게으른 내 손이 그걸 따라가자니 늘 눈과 손이 바빴다.
어제는 뒤늦게 오이도령도 시찰하고 갔다. 도령은 오자마자 저것들을 솎아줘야 할 텐데요? 하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제 막 빛을 본 새 생명들을 무참히 뽑았다. 내가 허겁지겁 다른 곳에 심어주려 하니 딱하다는 듯, 어차피 다 죽을 것 같은데.. 라며 유유히 사라졌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독한 것들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다른 곳에 심어진 오이는 다행히 잘 크고 있다.
처음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어설프지만 자꾸 부딪혀보니 이제 좀 작물에 대해 알 것 같다.
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 특히나 저렇게 갑자기 튀어나온 오이를 보면 역시 예정에 없던 아이라도 받아 든 심정이다. 말 그대로 '자연의 신비' 매일 감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