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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Mar 16. 2023

23-7. 변시지 폭풍의 화가

Hugo Books _ 우고의 서재

변시지 폭풍의 화가


변시지 작가를 처음 접한 건, 제주도 여행 중 우연에 기인한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보는 걸 좋아하는 나를 배려해 준 덕분에 짝꿍에게 안도 타다오가 건축한 미술관을 가고 싶다고 미리 언질을 해둔 상황이었다.

유민미술관과 본태박물관을 고민하다 본태박물관으로 향했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타다오의 차갑고 서늘한 그러나 자연에 녹아 있는 건축미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지만, 야요이를 포함한 작품들에서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해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서귀포에서 기당미술관이 우리 동선에 있다는 것을 알아챈 짝꿍이 그곳에 가보자고 나에게 제안했다. 짝꿍이 알아챈 건 기당미술관이 인근에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전시에 조금은 실망한 내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방문한 기당미술관은 멀리 한라산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아주 아름다운 자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코로나와 팬데믹에 관련된 기획 전시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2층에서 만난 변시지 작가의 상설전시는 내 인생에서 꽤나 큰 충격을 준 전시로 아직도 남아 있다.

영화관에서 4D로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변시지 작가의 회화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표현대로 '한국식 노란 장판 색'으로 빛나는 제주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거센 바람과 거친 파도 그리고 노인과 까마귀 등 작가가 정의한 제주가 캔버스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변시지 작가의 존재도 몰랐던 내가 그에 관한 찾아보고 책도 읽게 될 만큼, 작품은 충격이었다.



그런 변시지 작가를 당진 면천면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또 다른 인연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책방 오래된미래에서 책을 찬찬히 구경하던 중에 어느 한 코너에서 K 장판 색으로 빛나는 책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고, 이내 외마디 외침이 터져 나왔다.

"변시지!"

그렇게 변시지 작가의 일대기를 이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그가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것, 어린 시절 씨름대회에서 상급생을 상대로 경기를 하다가 다리를 다쳐 평생 다리를 절었다는 것, 스물세 살의 나이로 제34회 광풍회전에서 한국인 최초로 최고상을 수상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이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는 것.

일본에서의 성공 그리고 장밋빛 미래를 앞에 두고도 조국에 대한 사명과 그리움으로 귀국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는 것, 여러 학교를 거치며 후학을 양성했다는 것.

변시지 작가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하나둘 알아가는 재미에 밤이 지나 새벽을 향해가고 있는 것도 잊어버리기도 했다.

특히 작가가 고향인 제주도로 향해, 자기만의 화풍을 찾기 위해 고뇌했던 시기에 대한 글을 읽을 때는 창작에 대한 예술가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조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창작활동을 시작하면서 일본에서 배웠던 서양화 베이스에 동양화의 특징을 가미시키는 것을 경계했다.

고향인 제주도에서는 제주도의 근원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며 술로 매일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식 노란 장판이 눈에 들어왔고, 거기서부터 변시지의 화풍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어린 시절 변시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제주도스러운 것들이 곧 그의 캔버스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까마귀, 바람, 파도, 조랑말, 초가집. 그리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 버린 자기 자신의 초상까지도.


내가 변시지 작가의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은 '찬란히 아름다운 외로움' 이었다.

1982년에 그린 그의 작품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는 그런 감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사시사철 변치 않는 소나무에 기대 있는 이제는 늙어 버린 노인. 저 멀리 떠나는 배 한 척.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조랑말.

고독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니 서글프지만 아이러니하게 용기가 난다.

2013년 변시지 작가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0년 정도만 더 건강하셨더라면, 어떻게든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과 인생에 빠져들었다.

변시지 미술관 건축이 현재 추진 중이며 개관한다면 1,30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게 될 거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미술관을 통해 나처럼 충격적인 경험을 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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