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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효민 Apr 12. 2023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사랑의 화가 아고리

교육과정 가운데 이중섭을 만난 내 동년배들에게 그는 '한국의 고흐'라 불릴 만큼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화가, 민족의 혼을 황소로 표현한 화가, 화구를 살 돈이 없어서 담뱃갑의 은박지 위에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그림을 그린 가난한 화가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중섭의 삶은 정말 가난과 절망이라는 그늘로 가득하기만 했던 걸까?


우선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난이도의 티켓팅에 성공해야 했다. 평일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방문할 수 있다면, 비교적 쉽게 티켓을 예매할 수 있으나 '9 to 6' 직장인들에겐 소중한 연차를 쓰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나 역시 직장인이기에 평일엔 엄두도 못 냈고, 짝꿍은 일주일 중 일요일에만 가게를 닫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권 없이 무조건 일요일 티켓을 예매해야만 했다. 일주일 정도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새로고침을 열심히 한 결과, 겨우겨우 4월 9일 일요일 16:00 티켓을 2장 예매할 수 있었다.



마스크 해제와 함께 찾아온 봄은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다. 종각부터 인사동, 북촌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으로 걷는 내내 정말 많은 내, 외국인들과 스쳐 지나갔다.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렸던 일상의 소중함을 서서히 되찾아가는 것 같아서 감회가 새로웠다.


관람 시간이 1시간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이중섭을 충분히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입장시간이 4시에 딱 맞춰가지 않고 30분 정도 여유 있게 전시장 입구에서 대기했다. 입장을 기다리며, 온라인에 업로드되어 있는 온라인 가이드를 통해 전시에 대한 내용들을 예습했다. 이번 오디오 가이드는 고두심 배우가 녹음을 했는데 아나운서처럼 정확한 워딩으로 듣는 해설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들렸다. 하지만 깊은 내공의 원로 배우답게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호소력이 있었다. 오히려 우리 곁에 있었던 이중섭이라는 화가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효과도 있었다.


지난번 여의도 더 현대에서 '앤디 워홀' 전시를 볼 때는 EXO의 카이가 가이드 녹음을 했는데 연예인이 오디오 가이드에 참여하는 빈도가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다. 미술과 전시의 대중화가 무척이나 반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목소리로 업을 삼는 사람들의 설 기회가 점차 줄어드는 것이기에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에서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게 기증받은 이중섭의 작품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중섭 기소장품 10점을 모아 100여 점을 관람할 수 있다. 


이중섭은 1916년 일제강점기 속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1956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은 대한민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그대로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이중섭의 일생은 가난과 고통으로 가득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유복한 가정의 보호와 지원이 있었다.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서양화가 임용련 선생에게 미술 지도를 받았으며, 1936년에는 일본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했고 1937년에는 도쿄 문화학원으로 옮겨 미술을 전공할 정도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중섭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의 불행한 삶은 1943년부터 시작된다. 태평양전쟁으로 국제정세가 안 좋아지자, 북으로 돌아와 원산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50년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가족을 데리고 남한으로 피난길을 떠나게 된다.


부산, 제주도 등지에서 피란 생활을 이어가던 중 생활고로 인해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 이름 이남덕)'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그게 이중섭이 가족들과 함께 보낸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54년 진주, 1955년 서울 미도파백화점 화랑 및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며 작품 활동에 매진했지만, 이중섭은 언제나 가족들을 그리워했고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해 영양실조와 간경화 등을 겪다 1956년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크게 두 개의 파트로 구분되어 있다. 일본 유학 시기부터 원산에 머무를 당시 작업한 연필화와 엽서화를 전시한 '1940년대' 그리고 제주도, 통영, 서울, 대구에서 그린 전성기의 작품 및 은지화, 편지화 등이 전시된 '1950년대'로 나누어져 있다.


1940년대의 작품은 도쿄 문화학원에서 만나 연인이 된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화 37점과 소, 여인, 소년을 그린 연필화 4점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예술가에게 있어 창작이라는 이상의 대상이 사랑하는 현실의 인물과 동일시되는 사례들을 발견할 때면, 그 안에서 깊은 감동과 막연한 부러움들이 생긴다. 이중섭의 모든 작품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아들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르지만, 이중섭의 초기 작품인 연필화를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발생하여 점차 확장되어 가는 그 설레는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 느껴진다.


이중섭의 작품 혼이 가장 잘 담겨 있는 '소'와 함께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투영된 '여인'이 함께 있는 <소와 미인, 1842, 종이에 연필, 41x29.7cm> 이라는 작품이 그렇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종이의 한 가운데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그려 넣는다. 아직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자화상이 대부분 가운데 위치하고 양옆에는 보통 엄마와 아빠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발아래 강아지나 고양이를 두기도 한다.


이중섭의 세상도 그러했던 것 같다. '소'라는 생명체에 자기 자신의 이상향을 투영해 그림을 그리던 이중섭이 어느새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림에 그려 넣기 시작했고, 그 대상이 아내인 마사코였던 게 아닐까. 


이중섭은 <세사람>이라는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며, 제국주의와 전쟁에 대한 리얼리즘 시각을 담기도 했다. 앞서 마사코를 투영한 작품과는 상반된 어두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중섭은 1940년부터 1943년까지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많은 그림엽서를 보냈다. 앞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는 주소를 남기는 형태였다. 연필화에 비해 엽서화는 더욱 다채로운 색채가 사용되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으로 완성되어 있다. 이는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엽서였기 때문일 텐데, 그림에 대한 재능이 없는 똥 손인 나로서는 그저 부럽기만 한 로맨틱한 사랑 표현법으로 다가온다.


여인이 물고기를 안고 있고, 소를 타고 있는 등 연필화보다 더욱 깊은 스킨십을 하고 있는 그림들이 많다. 이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이중섭이 얼마나 마사코를 사랑하고 아꼈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엽서화처럼 그들의 생도 사랑으로 가득한 행복의 여정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5년 후, 북한은 남한을 기습 침공하여 빠른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중섭은 전쟁과 함께 부산으로 월남하였고 1956년 사망하기까지 제주도, 통영, 대구, 서울 등지를 옮겨 다니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1950년'대의 작품들을 전시한 공간에서는 새와 닭, 소, 아이들, 가족을 그린 주요 회화 작품과 더불어 출판미술, 은지화, 편지화, 말년에 그린 풍경화 등을 관람할 수 있다.


1946년 원산의 고아원에서 미술 교사 일을 잠시 하게 되었는데, 같은 해에 태어난 첫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때 이후부터 이중섭이 아이들을 종이에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서로가 몸을 맞대고 있거나 끈을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이들 사이에 게와 물고기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1951년 제주도에서 가족과 함께 지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은 잡품 활동과 함께 잡지의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 예술은 언제나 다른 예술 혹은 상업과 맞닿아 있다. 툴루즈 로트렉은 물랑루즈의 공연 포스터를 그렸고, 앤디 워홀은 의상 디자인을 하기도 했으며, 살바도르 달리는 유명 사탕 브랜드인 츄파춥스의 로고를 그리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작품 의뢰가 들어와 제작하거나 전시회를 통해 컬렉터에게 판매되는 것이 아니라면, 화가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2023년을 살아가는 많은 화가들이 예술강사를 하거나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중섭에게도 그러한 현실이 펼쳐졌다. 다만, 그가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 살았다는 것과 피난민 신분이었다는 점이 더욱 매서웠던 현실로 작용했을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중섭의 그림을 만날 시간이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 이중섭》에서 유일하게 파티션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에서 이중섭의 '은지화'를 만날 수 있다. 은지화는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검정 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회하 기법을 말한다. 1952년 6월 사랑하는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한국에 남아 작품 활동을 이어나갈 때 '은지화'를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은지화에는 정말 수많은 아이들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족을 그리는 화가, 즉 자신도 그려져 있다. 은지화는 이중섭의 가난하고 외롭고 괴로웠던 시절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절망의 창작물이었지만, 이중섭이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고 그리워하며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희망의 창작물이기도 했다.


사람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울 때, '속이 긁힌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은박지를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그림을 그릴 때의 이중섭의 마음이 그렇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림 속 행복한 얼굴의 아이들,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 그리고 자기 자신의 유곽이 드러날 때, 그는 일종의 치유를 얻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미어졌다.


공간을 가로로 길게 채우고 있는 스크린에는 이중섭의 은지화 속 아이들의 웃는 모습이 관람객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시인 구상이 쓴 글은 테이블 위에 쓰여 있었다. 영상과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소리 그리고 구상 시인의 글이 어우러졌을 때, 처음으로 전시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도 갑자기 터져버린 눈물에 너무 당황스러워서 짝꿍의 등 뒤에 얼굴을 묻고 잠시 감정을 진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어 짝꿍의 눈을 봤다. 아마 내 눈이 저런 눈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중섭의 가족을 향한 사랑에, 작품에 대한 열정에 그리고 그를 낭떠러지 끝으로 밀어붙인 그 시대의 현실에 우리는 눈물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흑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자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구상,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 「대향 이중섭」, 한국문학사, 1979년 4월, 141쪽





이중섭은 회화로도 가족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했다. 이별에 대한 아픔과 그리움은 온 가족이 한 데 모여 있는 모습을 통해 아름답게 표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중섭은 네 사람이 서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모습, 배를 타고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신, 원산에 두고 온 어머니 등을 그리며 가족과 재회하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네 가족이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마치 마티스의 <춤>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손을 붙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모습은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반복되어 내려오는 소재가 된다. 우리나라의 강강술래처럼 보통은 제전의 의미를 품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결국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아마 이중섭도 이 그림을 통해 가족과의 재회 그리고 평범한 삶(그러나 그에겐 가장 행복했을)을 바라고 또 바라며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전시의 마지막에는 '편지화'가 소개된다. 앞서 1940년대에 엽서화는 그림만 그렸다면, 이제는 글도 함께 보내게 된다.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두 아들의 학교생활, 1955년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노력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55년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열렸던 전시 이후, 이중섭은 급격히 쇠약해진 몸과 정신으로 인해 편지는 점차 줄어들었고, 가족에게 오는 편지도 읽어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이라는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 아고리는
머리가 점점 맑아지고 눈은 더욱더 밝아져서,
너무도 자신감이 넘치고 또 흘러 넘쳐
번득이는 머리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리고 또 그리고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어요.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가장 사랑하는 현처
남덕 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릅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에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선량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내 사랑하는 아내 남덕 천사 만세 만세.


 - 이중섭의 편지화 중



이중섭은 1956년, 41세라는 아주 젊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사망하게 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완공이라는 예술혼과 신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아가다 어느 날 열차에 치인 부랑자로 오해받아 싸늘하게 죽어간 '안토니오 가우디'처럼 이중섭도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나 연락이 닿는 사람이 없어 무연고자로 시체 안치실에 며칠간이나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천재 예술가 모두 사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존경하며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 이중섭》을 보고 나온 후, 다른 전시에 비해 감정적으로 현실감을 찾는데 시간이 좀 더 걸렸던 것 같다. 전시를 봤지만, 한 명의 예술가에 대한 영화를 본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본문을 써내려 오면서도 이중섭의 작품과 인생을 이야기하며 해외 유명 예술가의 이야기를 함께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만큼 사연 많은 삶을 살았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한 명의 예술가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호아킨 소로야'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로야 역시 바다, 소, 말 그리고 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이중섭의 그림이 조금 더 동심 가득한 동화의 느낌이라면, 소로야는 현실감 있는 영화의 느낌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이 두 그림에서 왜 나는 하나의 감정이 그려지는 걸까.


이중섭과 소로야 두 거장의 그림에서 나는 똑같은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미소 지어지지만 알 수 없는 슬픔의 감정도 함께 밀려온다. 제주도의 바다나 발렌시아의 해변이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은 희망의 장소로 느껴진다. 사랑을 담은 그리고 사람을 닮은 그림은 위대하고 위대할 수밖에 없다.


호아킨 소로야 역시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가족을 무척이나 그리워했던 한 명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전시 일정으로 떠나있을 때, 아내 앞으로 보낸 편지는 800통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에 한 통씩 보내더라도 2년을 훌쩍 넘는 엄청난 양이다.


나도 이중섭과 소로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들이 남긴 슬프지만 아름다운 메시지를 가슴속에 잘 품고 조금은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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