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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Nov 10. 2021

무기력한 프리랜서를 일으키는 임금체불의 맛

프리랜서 푼 돈 떼먹는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 이러저러한 이유로 원고료 지급이 조금 더 미뤄질 것 같습니다.」


미뤄지면 미뤄지는 거지 [미뤄질 것 같다]니?

이 무슨 미래 시제 같은 소리야.


의자에 기대 비스듬히 누워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저히 비생산적으로 시간을 낭비하던 평화로운 일상이 메시지 하나로 깨진 것이다. 심지어 사건의 당사자임에도 본인은 전혀 관련 없는 듯한 3인칭 어법에 '또야? 질린다 질려'하고 생각하며 팝업창을 눌러 나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몇 달 전 끝난 프로젝트 정산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마지막 몇 회의 원고료가 아직 지급되지 않았는데, 약속한 지급 기한은 지난 지 오래고 벌써 3번째 지급 날짜를 미룬 것이다. 그것도 꼭 입금하기로 한 당일날 오후가 되어서야 오늘은 못 준다며 다음으로 약속을 미루는 식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몇 번 당하다 보니 '그래 떼먹진 않겠지'하며 여유로웠던 마음에 슬슬 불이 지펴지는 게 느껴졌다. 몇 푼 안 한다지만 백수에겐 소중한 돈인데, 아니 애초에 일을 했으면 정당히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한데 이런 문제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현실에 짜증이 밀려왔다.


심지어 이번 정산 문제는 제작진뿐만 아니라 출연자까지 걸려있는 상황이라 더 신경 쓰였다. 정산 지급이 늦어질 때마다 매번 출연자들에게 출연료 입금이 늦어진다는 연락을 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었다. 아무리 촬영을 즐겁게 했어도, 상대가 성인군자라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심지어 돈 관련 문제라면) 상대에 대한 신뢰가 깨지기 마련이다.


약속 날짜를 계속 미루니 출연자 쪽에서는 이번에는 왜 늦어지는지 궁금한 게 당연하고, 똑같이 영문을 모르지만 일단 상대를 달래야 하는 작가들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죄송하다고 사과를 해야 한다. 문제의 원흉은 따로 있는데 을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는 상황이 된다. 내 잘못으로 상대에게 신뢰를 잃는 것도 힘들지만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신뢰가 깨지는 건 정말 허탈하다. 나도 피해자인데,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기분에 허망하고 이게 사회구나하고 깨닫게 된다.


'제발 이번 다음은 진짜였음 좋겠다' 고 생각하며 다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돌아왔다. 보던 책을 마저 읽으려 했지만 좀처럼 집중되지 않았다.


방송작가로 일한 지 10여 년. 지금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했지만 이렇게 정산이 밀리는 경험을 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방송 시스템상 TV 방영 후에 월급이 지급되기 때문에 한참 뒤에 돈을 받은 적도 있고, 출연자들의 출연료가 밀려서 그 항의를 제작진 대표로 받은 적은 많지만, 약속된 날짜에 지급되기로 한 월급이 미뤄지고 그게 몇 번씩 반복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건 방송작가들 중에서 꽤나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일을 했으면 약속된 돈을 받는 게 당연하지만, 의외로 많은 작가들이 페이 문제를 겪는다. 약속된 날짜에 월급 지급이 이뤄지지 않고 계속 미뤄지는 경우는 양반이고, 약속된 월급과 다른 방식으로 계산된(하지만 당사자는 동의한 적 없는) 훨씬 적은 월급을 받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회사가 돈이 없다고 버티다가 아예 안 주고 잠적해버리는 경우도 많다.


내가 운이 좋은 케이스라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작가가 많고, 꽤 만연해 있다는 뜻이다. 참 이상하다. 일을 했으면 그에 맞는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고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든 사회적 보호망이 있어야 하는데, 프리랜서 집단인 방송작가들은 어디에서도 보호를 받지 못한다. 제대로 받으면 '다행히''운 좋은'이 되고, 지급이 늦어지거나 못 받으면 '운이 나빴던' 일이 되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방송작가 협회라는 곳이 존재하지만, 협회에 가입하려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데다가 협회가 이런 문제를 나서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들은 적이 없다.


협회에 가입하려면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한데 대부분 방송 경력을 보기 때문에 가장 보호받아야 할 초년생들은 가입이 불가능하다. 게다가 과거 정규편성이 대부분이던 시절의 조건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데, 시즌제 프로그램이 많아진 최근에는 그 조건을 채우기가 굉장히 어렵다. 과거에는 5년을 일하면 5년짜리 경력을 채울 수 있지만, 시즌제가 많은 요즘은 5년을 일해도 방송이 나가는 기간은 반 정도, 나머지는 기획기간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기획기간은 방송 경력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경력이 꽤 있어도 협회 가입 조건을 채우지 못하는 케이스가 많은데 나 역시 11년 차지만 방송작가 협회 가입 요건을 채우려면 택도 없는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협회 가입은 포기한 상태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생긴 방송작가 유니온에 경우에는 방송작가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많이 내는 편이다. 최근 MBC 방송작가 해고 문제라던가 막내작가 최저임금 등 다방면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협회에 가입해야 한다.


그리고 협회의 문제는 뒤로 하고 근본적인 의문이 생긴다. 왜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에 전전긍긍하게 되고 통장에 찍히기 전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인력을 쓴다는 건 당연히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가 통하지 않는 건지 의구스러울 뿐이다.


2017년에 도입된 방송작가 표준 집필 계약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정말 애석하게도 나나 내 주변이나 누구도 그 계약서를 직접 봤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 표준 집필 계약서는커녕 일할 때 제대로 된 계약서도 없고 구두로 월급이 정해지는 관행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원고료 미지급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프로그램 시작 직전에 작가 선배가 작가들 계약서를 쓰자고 몇 번이고 외주제작사에 이야기했지만 '그럴 일이 있겠냐''왜 못 믿냐'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계약 이야기를 회피했다고 한다. 그러다 일이 바빠졌고, 선배는 마음의 불안함과 부채감을 가진 채로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했던 제안들이 거절되고 예상했던 운명을 맞이한 사람을 옆에서 보는 건 참으로 슬프다. 몇 달간 계약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지금도 그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는 선배를 보고 있으면 방송이 뭘까, 이 세계는 작가 인력을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좋아서 하고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취급받을 일일까?

약속을 어긴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을끼리 얼굴을 붉혀야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알면서도 이런 문제를 피하지 못하는 것일까?

예상 가능한 불행을 막는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당장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내 원고료도 못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이 어떤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래도 고민해봐야 할 가치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내가 돈 떼인 일이 없다고 내 옆 사람이 당한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밤샘 작업은 업계 특성이 될 수 있어도, 계약서를 안 쓰고 원고료 지급을 회사 마음대로 하는 일은 업계 특성이 될 수 없다. 이런 생각이 모두가 동의하는 당연한 가치가 되는 날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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