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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Nov 24. 2021

니트를 100개쯤 접다 보면

잡생각이 들 땐 잡일이 최고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많아진 지 두 달이 넘었다.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길 수도 있는 시간이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갑자기 생긴 보너스 타임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몰랐다. 애초에 일을 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갑자기 생긴 공백기의 무게가 유난히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사실 바로 일을 하려면 할 수 있었다.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고, 직접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러 갔던 곳도 있었다. 희한한 건 이렇게 일할 생각과 의지가 충분한데 어째서인지 현실은 묘하게 계속 어긋났다는 점이다. 머리로는 '계속 일해야지''빨리 돈 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조금만 쉬려고''어떻게든 되겠죠'란 말이 튀어나왔다.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같은 집에 살면서 머리와 마음의 의견은 왜 이리 다른 건지. 아무 대책 없이 그저 긍정적인 것처럼 떠드는 와중에도 속에서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단 불안감이 피어났다. 누구도 내 말에 의심하거나 그래도 일해야 하지 않겠냐 추궁하는 사람이 없는데, 스스로 만든 생각과 행동의 간극은 점점 넓어졌고 커다란 스트레스가 되었다. 그 결과 누가 봐도 잘 먹고, 잘 노는 주제에 밤마다 이를 악물고 속이 쓰린 상황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이 자신의 일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했을 때는 묘한 쾌감이 들었다. '이거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에 맺혀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지난봄 서울에 쇼핑몰을 낸 동생은 이 시국에도 악착같이 버티며 한 방을 노리는 중이다.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라는 마음을 가지고 일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안정화되긴 했는데, 그만큼 할 일이 많아져서 소소한 잡일이라도 해줄 사람을 찾다가 옆에서 놀고 있던 내가 선택된 것이다.


내가 선택된 이유는 간단하다. 우선 사장님들과 잘 아는 사이라 격 없이 편하게 일 시키기 좋고, 예전에도 동생 일을 도와본 경험이 있으며, 차가 있어서 출퇴근이 편하고, 무엇보다 지금 매우 심심한 상태라는 것이다. 아마 마지막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돈을 많이 줄 수 없는 형편이라 식사 제공이 전부인 수준이지만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과하게 넘치는 시간을 생산적인 활동으로 채우고, 더불어 잡념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스케줄이 생긴 것만으로도 땡큐다. 물론 차로 출퇴근해도 편도 1시간 이상의 먼 거리긴 하지만,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들지만 왠지 일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에 [동생의 일을 도와주느라] 잠시 취업을 미룬다는 것은 아주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줄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납득시킬 용으로.



동생 회사에 출근해서 내가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잡일들이다. 밤에 들어온 물건이 영수증에 적힌 내용과 맞는지 확인하고, 제품을 꺼내놓고 검수하고 라벨을 달아 1차 포장을 한다. 재고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현황을 체크하고, 오후에는 배송 건을 확인해 접수하고 포장해 택배 기사님이 오면 전달하면 하루 일과 끝이다. 여기에 근처 맛집 찾기, 밥 시키기, 말동무, 청소, 늦게 끝나면 집에 데려다 주기 같은 서브 퀘스트들이 존재한다.


내가 하는 수많은 자잘한 일 중 가장 좋아하는 걸 꼽자면 단연 니트 접기다.

검수를 끝낸 니트를 넓은 테이블에 뒤집어 놓고 팔부터 차근차근 접는다. 팔 라인에 따라 접은 후 몸통 부분을 반으로 접은 다음 뒤집어서 택을 달아준다. 컬러칩까지 함께 달아서 투명 비닐에 넣은 후 모양이 가지런하게 보일 수 있게 마지막으로 다듬어주고 접착면을 뜯어 포장하면 끝.

알록달록하고 부드러운 니트를 끊임없이 접다 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니트와 나만 남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랜만에 해보는 작업이라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한 번 작업을 할 때마다 묻고, 또 묻고를 반복하며 며칠 일하다 보니 이제는 물어보지 않고 스스로 일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는 사무실에 도착하면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의 분량을 확인하고 알아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해야 할 일이 많은 날은 시작하기 전부터 막막하게 느껴질 때도 있는데, 그런 부담감은 오늘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 단계에서 90% 이상 사라진다. 일의 분량과 관계없이 내가 해야 하는 목표가 확실해지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제까지 해온 일들은 불확실한 미래를 보며 과거, 현재, 미래가 섞여있었다. 그때그때 눈앞의 일을 처리하면서 불확실한 미래를 보고, 갑자기 다가오는 일에 대응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만큼 창의적이고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일이 펼쳐지지만, 내가 얼마나 일을 했는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 막막하다.


반면 니트 접기는 오늘 내가 해야 할 일과 분량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기만 하면 완수할 수 있는 데다 하루를 마감할 즈음에는 내가 오늘 얼마큼의 일을 했는지 눈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일에서 내가 성취한 것들을 명확하게 보는 경험은 흔치 않아서 차곡차곡 쌓여있는 니트만 봐도 마음이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곤 한다.


몇 주째 니트를 접고 재고를 쌓고 배송을 나가면서, 매일 조금씩 성취를 쌓았다. 별 거 아닌 일이지만 오늘 내가 한 일에 눈도장을 찍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내 마음과 행동의 간극이 조금씩 이해 가기 시작했다. 일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성과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왜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있었는지.


방송 일은 매일의 성취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시청률이나 조회수 같은 지표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고 매일 내가 열심히 일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나마 촬영 날은 촬영이 끝나면 무언가 했다는 확신이 드는데, 그 외에는 그냥 하루가 흘러간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회의라도 길게 하는 날엔 집에 가는 길에 '오늘 뭐 했지?' 의문이 들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 마음이 이런 시간을 기다렸단 생각이 든다. 열심히 일하자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간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의문을 계속 가지고 있으니, 한 번은 멈춰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매일매일 그날의 일에 대한 성취를 느껴보면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성취감을 채울 것인지 그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동공을 살짝 풀고 니트를 100개쯤 접다 보니 이런 생각까지 닿았다. 규칙적인 소일거리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여기까지 닿았을까 의문이 든다. 아직 답은 모르겠지만 매번 멈춰있던 생각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 아닐까?


정답을 찾을 때까지, 당분간을 니트를 접고 계속 접어야겠다.

머리는 복잡해도 손을 움직이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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