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 킴 Dec 14. 2019

폭풍은 나무를 더 깊게 뿌리내리게 만든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 본 경험은 인생에 약이 될까?

난 이제 '벨기에어서 천일동안'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에필로그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내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벨기에를 가게 됐는지를 마지막 글에서 말하고 싶어 졌다.

오히려 글의 순서상 프롤로그에 담겼어야 할

글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공직생활을 12년 넘게 할 무렵인 2015년의 일이다.


 승진을 하고 나면 어느새 만신창이가 된 내 몸과 영혼을 발견하고 스스로 어루만지게 된다.

승진이라는 골인 지점을 앞두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쓰게 되는가 보다. 

하지만 다른 동기들보다  달 빨랐을 뿐, 큰 의미가 없었다.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훌쩍 커버린

아들과 딸을 보게 되었다.

 내가 너무 가족들에게 무관심했구나.

승진만 바라보고 주말도 야간도 오직 일에만,

상사에게만 집중했던 시간과 에너지들이었다.

두 아이 육아와 가사 노동으로 다크서클이 한참 내려온 아내에게도 숙연해졌다.

아이와 놀아주지 못한 수많은  육아시앞에서 

죄책감마저 들었다.


한편 정신을 차려보니 사무관 때 유학을 갔다 온 동기들이 방긋 웃으며 회사로 하나둘씩 복귀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어 실력이 좋아서, 또는 정치력이 좋아서

 일찍 유학을 갔다 온 케이스다.

마치 승진 시기를 맞춰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에게 불필요한 질투심이 생기기도 했다.


나같이 영어 실력이 약하거나 정보력과 정치력이 약해

속에만 매몰된 사무관들유학 기회에서 계속 멀어지고, 서기관 승진 후에야 비로소 유학을 도전하는

2부 리그가 되는 것이다.


2015년 7월, 한여름에 서울대가 주관하는 영어시험을 봤다. 영어 성적 순서로 2등까지 유학을 갈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3등을 했다.

10월에 국내 1년+해외 1년 과정에 재도전해 보았지만,

점수 1점 차이로 낙방을 맛보았다.

합격자는 짜릿한 쾌감을 느꼈겠지만,

나는 몹시 씁쓸하고 방황하는 시간들이었다.


결국 서글픈 연말을 보내고 2016년 새해가 왔을 때

 1년의 직무 훈련 신청을 했는데도 또다시 실패를 했다.

이쯤 되면 내 실력의 미천함을 인정하기보다

내가 속한 조직까지 원망하기 시작한다.


"난 13년간 성실히 회사를 위해 희생해 왔는데,

아침마다 코피도 자주 고,

고지혈증 위험 수위인데도 병원 갈 시간 없이

 회사에 충성해 왔는데,

이 조직은 나를 위해 무엇을 보상하고 있나?"


나만 홀로 이 조직에서 외롭게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인사위원 6명을 일일이 찾아가

나의 애환을 설명했다.

 모두 경청은 해 주었지만, 별다른 해결책은 없었고

남을 돌볼 여유나 관심마저도 없어 보였다.


오직 Eric Carmen의 'All by myself' 음악만이

나를 위로해주곤 했다.

난 그때 결심했다.

내가 스스로 실력을 쌓기 이전에는

누군가에게 의존해도 소용없다.

조직 기여도와 상관없이 몰래 숨어 영어 공부하던 친구들에게 기회가 더 보장되는 세상.... 


어느 것이 더 공정한 사회일까? 혼란스러웠다.


내 밥은 내가 챙겨야지. 누가 대신 먹여주지 않는다.

그만큼 자존심이 상했고, 세상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절망감의 연속이었다.

조직은 온정주의를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냉정했다.


 번의 폭풍 속에서  참혹한 실패를 겪었고,

그럴수록 난 더욱 뿌리가 깊어지도록 강해졌다.

 더 독해졌기에 어느 순간 높은 영어점수를 획득했다.

 그리고 관세와 대외경제 경력이 있었기에  운 좋게도 유학보다 더 조건이 까다로운 국제기구를 갈 수 있었다.


난 그 누구보다 어렵게 해외 경력의 기회를 받았고,

 '대기만성' 한자성어가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벨기에에서 천일동안은 나의 열정과 감사함이 곳곳에 숨어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벨기에로 떠나는 날, 가족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인천 공항으로 가는 날,

택시 안에서 'All by myself' 음악을 틀었다.


택시 기사도 흥얼거리고, 나도 흥얼거리고,

아내도 흥얼거리고 아들도 흥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하나 또르륵 굴러 떨어질 때

미러로 아내를 보았다.

저녁노을이 지는 하늘을 올려보며

아내도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상공에 떴을 때 난 속삭였다.


'폭풍은 나무를 더 뿌리 깊게 만든다.

고난과 역경 후 실패의 경험도, 자존심의 추락마저

내 인생의 약이 되는 것이라고....'





그동안 벨기에에서 천일동안을 구독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연말 되시고,

2020년 새해에 풍성함과 행복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내년에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찾아뵐께요.^^

매거진의 이전글 수호랑 탈을 쓰고 멋지게 춤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