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대학원생의 진로 이야기
나는 UX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다. 본의아니게 비대면 수업이 2학기째 이어지면서 우스갯소리로 사이버 대학원이냐는 소리도 듣는다. 기말까지 할 게 많다며 마음만 급하지, 사실은 닥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슬슬 콧구멍으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오니 자연스레 작년이 떠올랐다. 내가 UX를 왜 한다고 했더라? 어쩌다 지금 이러고 있는 거였지? 12월까지 주어진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 나를 돌아보고, 20대에 접어든 이후 선택을 거듭했던 날들을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영원히 학생일 수는 없잖아
14학번이었던 2014년부터 2020년까지 난 7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셈이다. 학생의 신분을 빌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지 오래 고민하고 재고 따졌다.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겠다며 매년 그 마감일을 늦췄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어서야 쫓기듯 정한 감이 없잖아 있다. 돌아보면 작년 이맘때의 선택은 최선이자 더할 나위 없었던 선택이었고, 지금 그 선택에 책임지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때의 선택이라 함은 ‘앞으로 신기술 기반의 UXer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UX 전문가로서 커리어를 쌓아보겠다’라는 것이다. UX를 위한 전공은 따로 없다고 하지 않나. 나도 UX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햇수는 1 년이 될까 말까다. 그러게, 나는 어쩌다 UXer가 되기로 마음 먹었을까?
독서실 책상보단 록타이트가 낫다
학창시절 피아니스트 - 인권변호사 - 음악감독 - 방송 PD까지 휘황찬란한 꿈을 거쳐 첫 번째로 선택한, 아니 선택받은 전공은 미술이론이었다. 전시기획을 염두에 두고 입학했지만 미술이론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서는 미술사를 공부하는 것이 당연히 먼저였다. 안타깝게도 역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데다 조용히 앉아서 혼자 공부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차라리 철물점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여럿이 악기를 만들고 골판지로 타자기를 만들고 생닭을 받아 만져본 다음 헌옷으로 닭의 뼈까지 만드는 뭐 그런 수업이 훨씬 재밌었다. 록타이트가 손에 붙어서 피부가 조금 뜯기는 건 괜찮아도 독서실 책상은 괜찮지 않았다. 그러니 당시에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다른 전공들이 훨씬 눈에 들어왔다. 대중과 가까워지고 싶었고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가 충만했다.
죽어도 수능은 다시 보기 싫었는데 다시 선택의 기회를 얻기 위해 제발로 고독의 길에 들어섰다. 학생부, 논술 등 수시 입시부터 정시에다 마지막에는 미술 입시까지 안해 본 입시가 없다. 그렇게 세 번째 수능을 볼 때쯤 되니까 학교 이름, 전공 이름보다 가서 진짜 뭘 배우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주요 대학의 모든 학과를 프린트한 다음 하나씩 지워봤다. 문과였으니까 이과는 못 가고, 어문은 아니고 교육 계열도 아니고 경영 쪽도 아니고… 그러던 중 처음 들어보는 과를 발견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랩실이 쭉 적혀있었는데 난 그게 대학원 연구실인 줄 꿈에도 몰랐다. 대학에 가면 쓸 수 있는 실험실 내지는 실습실인 줄 알았다. 이름만 들어도 새로웠다. 오디오 인터랙티브, 크리에이티브 콘텐츠 등 ‘인터랙티브’, ‘크리에이티브’ 이런 말들이 나를 자극했다.
융합콘텐츠학과? 거기서 뭐 배우는데?
그렇게 두 번째로 맞이한 전공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융합학문이었다. 4 년 동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서 늘 전공에 대해 대답할 멘트를 생각해가야했다.
‘혹시 전공이 어떻게 되세요?’
‘아, 융합콘텐츠학과요.’
‘유아콘텐츠학과요?’ ‘문화콘텐츠학과요?’
‘아니요, 융합콘텐츠학과라고 새로 생긴 과예요. 제가 1기고요.’
졸업할 때쯤 되니 다들 힘들어서 동기들끼리는 절대 첫 번째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농담을 하곤 하지만 1학년 때는 패기가 있었다. 새로움을 갈구하던 나에게 ‘융합콘텐츠’는 버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고, 게이미피케이션부터 VR, 트랜스미디어콘텐츠, IoT, 유저저니맵 등 있어빌리티로 무장한 새로운 지식들을 모두 품에 안았다.
배울 때는 분명 재밌었는데 이 학기에는 기획 수업 들으며 익숙해질 때쯤 다음 학기에는 디자인 수업을 듣고, 아 이제 기획이랑 디자인 좀 알았다 싶으면 그 다음에는 코딩 수업이 잔뜩인 상황 속에서 몸이 하나인 인간이 융합형 인재로 거듭나기란 쉽지 않았다. 고학년이 되니 머릿속에 든 건 없는데 끊임없이 새롭게 기획하고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뽑아내야만 하는 상황이 잠시 끔찍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웃긴 건 서양화과, 소비자학과, 철학과 등 타과 수업을 듣고 인문예술미디어라는 또 알 수 없는 전공을 부전공 삼으면서 그나마 내 전공 수업이 제일 재밌었다는 거다.
그래서 대체 뭘 배웠다는 건데?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들었던 전공 과목을 나열해보자면 이 정도다.
디지털스토리텔링 개론
콘텐츠 아키텍처링
메이커스 워크샵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사운드 디자인
UI 디자인
게임 알고리즘
브랜드 스토리텔링
UX 디자인
가상현실 콘텐츠
콘텐츠 시스템 프로젝트
이름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데 이걸 듣는다고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재가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어깨 너머로 배우듯 기획, 디자인, 개발을 넘나드는 융합콘텐츠라는 영역에서 다루는 용어들에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배워야 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사라졌다. 코딩도 하면 할수록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더더욱 깨달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정 필요하다면 맛은 볼게, 이 정도까지 왔다.
나는 누구인가
다들 전공대로 사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심화전공까지 했던 융합콘텐츠학이라는 신학문의 범위 안에서 진로를 찾고 싶었다. 미디어 아트를 해볼까 했지만 뭐라도 만들어보니 스스로 크리에이티브함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게임이나 스토리텔링 쪽에서는 덕후들을 이길 수 없었다. 코딩은 수업 들으면서 한 번도 잘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UI/UX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니 아래와 같았다.
혼자 하는 일은 하염없이 미뤄도 팀플이라면 열과 성을 다해 밤샘까지 불사할 정도로 같이 일하는 게 즐겁다.
내 생각을 말과 글로 전달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사람이 늘 궁금하다. 내 또래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부터 시작해 대중교통을 타면 나도 모르게 사람을 관찰하고 있다.
불편한 점이나 불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새로운 일이나 환경,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늘 현실을 직시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관심사가 넓고 얕다.
아이디에이션, 사용자 조사, 리서치, 인사이트 도출, 유저 시나리오, 프로토타이핑 등을 통해 서비스를 구체화하고 이를 글로 정리하거나 말로 전달하는 일은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로세스는 같아도 도메인이나 서비스의 형태가 달라질테니 매번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5 년, 10 년 후에 전문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UXer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어떤 UXer가 되어야 할까
여름에 UX 직무로 인턴을 한 후 얼마 전 신간 <일단 해보라구요? UX?>를 읽으면서 UXer의 역할이 조금씩 머릿속에 정리되기 시작했다.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는 사람, 사용자에게 최상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 정량적 데이터와 정성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용자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생각한 바가 구현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전문가와 협업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 이것 말고도 더 있지만 이 시점에서 UXer의 역할을 정의내려본다면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UXer는 늘 배우고 성장해야 주어진 문제에 대해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종합적 역량을 갖추고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하기 싫은 마음은 잠깐 접어두고 다시 성실하게 내 일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