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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피늄 May 15. 2020

나의 선인장에게



지금은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거실 한구석을 보다가 식물의 빈자리가 꽤 크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선인장이 있었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오랜만에 물을 흠뻑 주고 여느 때처럼 창가에 두었는데, 그날 바람이 많이 차가웠던 걸까. 갑자기 내려간 온도에 선인장은 버티지 못하고 검은 반점을 보이며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인장과 헤어졌고 4년 가까이 선인장의 집이 되어주었던 화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오일장 구경을 갔다가 우연히 한눈에 반한 선인장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꽤 비싼 가격에 지갑을 쉽게 열진 못했고, 시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살까 말까 계속 고민을 했다.


결국 사는 걸로 결정하고 나서 그곳을 다시 향하는 와중에도 혹시 그사이에 팔렸을까 봐 불안할 만큼 내 마음에 쏙 드는 선인장이었다.


다행히 처음 본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새 토분으로 갈아입은 선인장과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너는 이렇게 나랑 지낼 운명이구나 하고.


새삼스럽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선인장의 빈자리가 마음을 울적하게 한다.






식물을 키우다 보면 온도와 습도, 바람과 햇빛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하는 식물인지, 약간 건조하게 키워도 괜찮은지, 햇빛이 얼마나 필요한지 등등 성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날씨는 매우 중요하다.


반면 어쩌다 한번 물을 주면서 무심하게 키워도 잘 자라는 식물도 있다. 내겐 선인장이 그랬다.


힘없이 축 늘어뜨린 잎을 보이며 물 좀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식물도 있지만, 선인장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 자리에서 조용히 성장해왔다.


선인장의 빈자리는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식물을 좋아하면서도 게으름이 앞서 방치해 두진 않았는지, 키가 커갈수록 수형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애정이 식은 건 아닌지. 반려식물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되짚고 반성했다. 내가 선택한 식물이니까 최소한의 책임감은 갖고 돌봐야 하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잠시 그걸 잊고 산 것 같다.






익숙함에 가려져서 관계가 소홀해지기 쉬운 건, 식물과 나 사이에도 있는 일. 내 곁에 있는 모든 것들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각자의 몫을 존중하고 적당한 책임감을 갖고 산다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내 노력과 애정이 닿은 만큼 싱그러운 모습으로 보답하는 식물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이렇게 정직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식물과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관계의 소중함을 배운다. 그리고 식물을 섣불리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고유한 색을 가진 아름다운 잎을 볼 때마다 설레지만, 긴 시간을 함께 살아가는 반려식물이기에 그에 맞는 환경을 갖추고 나서 곁에 두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식물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돌보고 싶다.






요즘은 밤새 자라난 식물들의 잎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햇빛을 먹으며 쑥쑥 자라는 스파티필름 바리에가타, 동글동글한 잎이 사랑스러운 페페로미아 호프, 주황색 꽃이 피고 지는 카랑코에, 은빛 무늬를 영롱하게 반짝이는 스킨답서스 픽터스를 먼저 창가로 옮겨 놓고 창문을 열어 바람과 햇빛을 보여준다. 그리고 물을 줄 때가 되었는지 흙을 만져본다.


미리 받아놓은 수돗물을 분무기에 담아 습도에 민감한 오르비폴리아와 고사리과 식물들에게 뿌려준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있는 싱그러운 이파리를 보면 덩달아 내 기분도 상쾌해진다.


마치 중요한 의식처럼 식물에게 안부를 묻는 아침은 내게 소중한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관심과 애정을 준 만큼 식물은 연둣빛 새 잎을 빼꼼 내밀며 보답을 한다. 받은 만큼 돌려줄 줄 아는 식물의 모습이 순하고 귀엽다.


선인장이 내게 남기고 간 생각의 조각들은 나의 아침을 바꿨고, 식물과의 교감을 일깨워 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선인장을 다시 키우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글을 쓰면서도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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