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시와 산책
책을 읽다가 마음이 움직이는 문장을 만나면 노트에 그대로 옮겨 적고, 감상 몇 줄을 덧붙인다. 어떤 날은 그 몇 줄을 쓰다가 무심코 어딘가에 닿아서 한껏 부풀어 올라 종이를 가득 채우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부풀었던 마음은 가라앉았을 때, 노트를 다시 열어보면 신기하다. 그새 깜빡 잊고 있었던 생각들이 많아서. 남는 건 사진뿐이니까 부지런히 찍어두는 것처럼, 희미해지는 것들을 글로 남겨놓아 다행이다.
가끔은 필사를 하다가 글을 그대로 마셔버리는 상상을 한다. 꿀꺽 마시고 나면 푸석푸석한 나의 글과, 늘어지다 끊겨버린 문장들에 다시 생기가 돌 것 같았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이 그랬다. 글이 눈처럼 깨끗하고 아름답다. 닮고 싶은 문장들을 종이에 옮기면 종이에서 펜으로, 펜에서 손끝으로 천천히 흘러들어와 내게 흡수가 되고 완전한 내 것이 되었으면 했다.
책은 11월의 숲으로, 한겨울 얼어버린 강 앞으로, 봄날 꽃그늘 아래로, 떠들썩한 바다와 우물처럼 으스스한 강, 아름다운 노을이 보이는 서쪽으로 데려다준다. 고요한 산책길을 걷다 보면 작가의 일상과 사유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는 시가 있고, 시를 닮은 기억이 있다. 작가는 기억을 곱씹고 풀어내어 밀도 있는 글로 완성했다. 얼마나 많은 사색의 시간을 지나온 걸까.
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 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 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 것이다.
<시와 산책> 행복을 믿으세요? 중에서
특히 행복에 관한 글이 인상 깊다. 그 의미에는 다양한 해석을 둘 수 있겠지만, 내겐 ‘괜찮다’는 다정한 위로로 다가왔고 울컥했다.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인 걸까. 온기 가득한 글들이 마음속 딱딱하게 굳어있는 얼음들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편안했다.
오늘은 하얀 겨울 숲을 걷는다.
고요한 숲 속에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퍼지고 내 뒤로는 움푹 들어간 발자국이 남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발자국은 늘어나고 필사의 흔적은 눈 위의 흔적처럼 고스란히 하얀 종이 위에 남는다.
종이 위의 발자국은 그대로 나의 감각으로 남길 바란다. 그래서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문장이 술술 나오기를. 이렇게 욕심이 섞인 절실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반갑고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