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 드라이버>
생명체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레비스 비글은 베트남전에 참가했다가 명예 제대한 인물이다. 택시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에 적응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열망과는 달리 차창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도시의 밤거리는 그저 낯선 타인들에게 속한 세상일 뿐이다. 마음속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자리를 찾는 거야’라고 자꾸 되뇌어보지만 그의 삶은 세상과 유리된 채 외로움만 가득하다. 불안감으로 인해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리고 반복되는 무의미한 삶은 권태롭기만 하다. 어느 날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여성과 사귀어보려고 접근한다. 하지만 첫 데이트에서 실패하고 그녀로부터 거부를 당하자 여성에 대한 반감과 혐오감을 갖게 된다. 동료 택시기사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지만 ‘직업이 바로 너 자신’이라는 그의 말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채 자신의 자리를 찾는데 실패한 트레비스는 타락한 사회를 향해 증오심을 마음속 깊이 키워간다. 급기야 증오심의 총구는 한 유력 정치인을 향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암살 시도는 범행 현장에서 사전에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자 트레비스의 증오심은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창가에 붙들려 있는 한 어린 소녀에게로 향한다. 사창가로 찾아가 업주를 무참히 살해한 뒤 소녀를 구해낸다. 살인을 통해 세상의 타락을 단죄하는 도덕적 심판자의 지위를 획득한다. 참을 수 없었던 삶의 무력감을 벗어던지고 세상을 향해 힘을 향한 의지를 당당히 드러낸 것이다. 온통 피를 뒤집어쓴 트레비스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번진다.
세상 만물 중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질문하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놓고 고민하는 인간 특유의 존재방식을 ‘실존’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시간 우리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이러한 실존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어쩌다 삶이 공허하거나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문득 들 때도 있지만 이런 문제를 두고 골몰하기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재미와 위안거리 속으로 재빨리 도피한다. 평범한 삶이 제공하는 안락함 속에서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데 만족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추구하지 않고 남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삶 속에는 늘 불안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불안은 ‘존재론적 불안’이다. 인간은 자신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사실에 직면할 때 불안이 엄습해 옴을 느낀다. 죽음 앞에 서면 그동안 의지해왔던 세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바로 그 순간 존재의 문제가 서서히 고개를 들면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실존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 )에 의하면 애초부터 인간은 무슨 목적이나 이유 따위가 있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그저 공허한 ‘무’의 상태로 세상 한가운데로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론적 불안은 인간에게 맡겨진 필연적 과제다. 고유한 존재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여 근원적 불안을 해결하는 일은 자신이 전적으로 떠안아야 하는 무거운 짐과 같은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자기 자신을 확증할 때까지 불안, 권태, 공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택시 드라이버> 속 트레비스 역시 존재론적 불안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좋아하는 여성과 의미 있는 관계 맺기를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동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택시 운전사라는 직업이 그에게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 날 쫓아다닌다, 어디든지
술집에서도, 차에서도
길이든 가게든 어디든지
도망갈 곳이 없다
난 외로운 인간이다
- 영화 <택시 드라이버> 中 트레비스 비글의 독백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인간은 행위를 하고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증한다. 실존적 고뇌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던 트레비스는 어린 소녀를 갈취하던 성매매업주를 처단한다. 이 같은 살인행위는 사회악을 척결하는 심판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적극적 표현방식이다. 그의 눈엔 밤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인간들이 모두 인간쓰레기, 인간 말종이며 도시 전체는 냄새나는 하수구나 마찬가지다. 한바탕 소나기라도 내려야 변기 물에 오물이 씻겨 내려가듯 거리가 깨끗해질 터였다. 트레비스는 결심한다, 스스로 거리의 청소부가 되기로. 그러자 불안감은 가시고 존재의 의미가 되살아나고 삶의 지향점이 분명해진다. 자신은 고귀한 자, 우월한 자, ‘정의의 사도’, ‘악의 척결자’로 우뚝 올라선다. 반면에 길거리의 저들은 저급하고, 불의하며, 열등한 자들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저들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엄히 심판받아 마땅한 불경한 행위다. 트레비스는 거울 앞에 선 채 보이지 않는 저들을 향해 어이없는 표정으로 “You talkin’ to me?”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드러낸다. 그리고선 마침내 오물과 같이 세상을 더럽히는 저열한 인간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의로운’ 분노를 폭발시킨다.
2010년 서울시 양천구 신정동의 한 다가구주택 옥탑방에 어떤 남자가 무단으로 침입했다. 그는 다짜고짜 흉기로 남편을 살해하고 아내에게는 중상을 입혔다. 가해자와 피해자들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살해 동기를 묻자 가해자는 길을 걷다가 옥탑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격분했다고 말했다. 일용직 노동자인 가해자는 범행 당일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울적한 마음에 놀이터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 때마침 그의 귀에 들려온 웃음소리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조롱하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남들은 다들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자신만 세상 속에서 방황하며 어렵게 사는 것 같아 화가 치밀었다고 했다.
정신분석가 롤로 메이(Rollo May)는 ‘무력감이 어떻게 폭력을 유발하는가?’하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실존 문제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저서 「권력과 거짓순수」의 첫머리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권력이 필요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권력이란 타인과의 관계에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메이에 의하면 권력의 경험은 한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고 자기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사람은 세상과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 역시 ‘힘의 느낌’, ‘권력에의 의지’를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그는 모든 생명체 안에는 권력의지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자의 내면에도 스스로가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기꺼이 봉사하는 것은 자신보다 더 약한 자를 지배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행복이 가져오는 첫 번째 효과는 힘의 감정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인간에 대해서든 표상에 대해서든 상상의 존재에 대해서든 이러한 힘의 감정은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선물을 주는 것, 조롱하는 것, 파괴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람이 무기력해지면 타인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처럼 느끼게 된다. 무력감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느낌이다. 마치 ‘얼굴 없는 타인’으로 존재하는 듯 한 느낌이다. 사실 무력감은 힘이 빠져나간 느낌이라기보다는 무엇에 의해 ‘시달리고, 괴롭힘 당하며, 박해받는 느낌’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지점은 무기력이 권력을 향한 욕구가 거세된 게 아니라 단지 억눌려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순간도 자신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이 하찮은 존재처럼 느껴져도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자 하는 욕망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무력감은 불씨가 완전히 꺼져버린 사화산이 아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땅속 깊은 곳에선 뜨거운 용암이 끓고 있는 휴화산이다.
메이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폭력이 무기력에서 자라난다고 단언한다. 권력이 너무 많아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무기력하기 때문에 더욱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폭력의 근원에는 자기 긍정을 향한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은 대인관계 속에서 자존감을 정립하고 자아상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어떻게 해서든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떠안은 존재다. 무력감의 덫에 걸린 자에게 폭력은 자신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처럼 여겨진다. 폭력은 무기력한 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타자와 세상을 상대로 전개하는 필사의 투쟁 같은 것이다.
폭력이나 그와 비슷한 행동들은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하며, 힘이 있다고 느끼게 해 준다... 그다음으로 폭력은 그 개인에게 자신이 의미 있다는 느낌을 준다.
- 롤로 메이
물론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이 기뻐할 만한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의 환심을 살 수도 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면 할수록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영향력은 커져간다. 사르트르가 말한 타인에 대한 ‘제1의 태도’가 이와 유사하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타인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한다.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자이고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자이다. 나에 관한 존재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타인을 그의 시선과 함께 고스란히 내 안에 포용하는 것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람이 나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면 된다. 나에게 마음을 빼앗긴 그는 나의 사소한 눈짓에도 한껏 반응하고 나의 말 한마디조차 그에게 중요한 의미가 된다. 사랑받을 때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샘솟는 이유는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람은 말과 눈짓과 몸짓으로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그제야 공허하고 불안했던 내면에 안식이 찾아든다. 그러나 만일 상대가 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거나 나의 구애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 영화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레비스 역시 한 여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물을 주고 데이트 신청도 하면서 노력한다. 하지만 그의 구애는 거부되고 사랑의 관계 맺기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첫 번째 방법이 어려운 이유는 상대방이 내 맘처럼 쉽게 나를 사랑해주지도 않고 일단 시작된 사랑도 한순간에 변질되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제1의 태도가 실패한 지점에서 ‘제2의 태도’가 시작된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근거를 찾으려던 희망을 접어버리고 차라리 타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빼앗아 버리는 쪽으로 작전을 변경한다. 타인과 사디즘의 관계를 맺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간단히 말해 폭력을 행사해서 타인의 육체를 나의 힘 아래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폭력을 통해 궁극적으로 내가 차지하는 것은 육체 안에 갇혀 버린 타인의 자유이다. 타인은 나로부터 자유를 탈취당한 채 나의 주체성과 자유에 떠맡긴 한낱 객체로 전락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 타인과 증오의 관계를 맺을 수도 있다. 자유와 주체성을 둘러싼 타인과의 갈등을 완전히 끝장내는 방법은 타인을 영원히 제거하는 것이다. 죽음과 함께 나의 주체성을 위협하던 타인의 시선도 사라진다. 죽은 자는 나를 바라볼 수도, 나를 객체화할 능력도 없는 존재다. 사랑의 관계 맺기에 실패하고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자에게 폭력은 자기 긍정을 위한 효과적이고 손쉬운 수단이 될 수 있다. 어쩌면 폭력이 가진 매력은 니체의 주장처럼 고통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에게 가해지는 강렬하고 직접적인 힘의 체험에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힘의 체험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확증한다. 그래서 권력 경험에 목마른 약자들, 긍정적 관계를 통해 존재의 의미를 확인받지 못한 자들에게 폭력은 더더욱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기쁨을 주거나 고통을 줌으로써 우리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다. 그 이상의 것을 원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의 권력을 느끼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 고통을 가한다. 왜냐하면 기쁨보다 고통이 권력을 느끼게 하는데 훨씬 강한 느낌을 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성폭력의 본질은 사르트르가 말한 사디즘의 관계나 증오의 관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흔히 사람들은 성폭력범을 과도한 성적 욕구의 소유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강간범의 심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강간을 개인의 성적 욕구가 발현된 결과로만 볼 수 없다는데 견해를 같이한다. 가장 일반적인 유형의 강간범은 대상을 성적으로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지배와 통제 욕구를 충족하려는 ‘권력형 강간범’이다. 그다음으로는 강간행위를 통해 모든 여성들에 대한 경멸과 적개심을 표출하는 ‘분노형 강간범’이 많다.
강간을 통해 이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는 이상적인 자기상(self image)을 확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보유한 강력한 성적 능력 때문에 상대 여성이 이미 자신을 원하고 있다거나 또는 적어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자신을 원할 것이라는 왜곡된 믿음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강한 남성’이라는 믿음을 사실로 증명하는 것이다.
권력형 강간범에게 강간은 힘으로 상대방의 육체를 소유하고 그 위에 군림함으로써 자기상을 완성하는 행위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사디즘의 관계를 추구하는 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복과 승리이며 힘의 체험이다. 이런 유형은 종종 어린 소녀나 힘없는 노인처럼 취약한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저항을 손쉽게 무력화할 수 있으며 육체를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형 강간범의 욕망의 본질은 성욕이라기보다 지배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행위도 성행위가 아닌 폭력행위에 해당한다.
분노형 강간범은 자신의 남성성에 의문을 제기한 여성에 대한 보복으로 강간을 저지른다. 그들의 내면에는 자신이 ‘충분한 남성’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성적 무력감은 자신의 남성성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분노의 대상은 여성 일반이며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가진 '여성성'(femininity)이다. 여성이라는 타자는 나를 초라한 남성으로 객체화시키는 시선이다. 그런데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앗아갈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여성성에 있다. 강간은 여성성을 파괴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강간범들은 범행 과정에 피해 여성의 성기를 일부러 훼손하기도 한다. 자신을 객체화하고 무기력에 빠뜨린 원천인 여성성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바와 같이 여성이라는 타자와 증오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살인이 생명을 빼앗는 행위인 것처럼 강간은 여성성을 제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바로 그 시선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레드 아웃’(redout)은 갑자기 피가 머리 쪽으로 쏠려서 안구가 충혈되고 세상이 붉게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종종 비행기가 급강하할 때 조종사의 머리 쪽으로 원심력이 가해지면서 발생한다. 레드 아웃으로 눈과 뇌의 혈관이 터지면 망막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고 심하면 뇌출혈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 갑자기 분노를 폭발시킬 때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캐나다 심리학자 도날드 더튼(Donald G. Dutton)은 그의 저서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어떤 남자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그 남자는 아내와 함께 파티에 참석했는데 십 여분 정도 아내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자 그는 아내가 어디선가 그녀의 직장 동료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의심했다. 하지만 당시 아내는 발코니에서 두 명의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아내의 외도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한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곤하게 잠이 든 아내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그런데 더튼과의 인터뷰에서 그 남자는 아내를 폭행하던 순간의 경험을 마치 “적조(赤潮)에 빠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고 표현했다. 바로 레드 아웃이 발생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말에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말이 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힐 때 몸 안에 있는 혈액이 순식간에 얼굴 쪽으로 솟아오르는 느낌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레드 아웃은 해리성 기억상실을 동반한다. 극도의 분노와 흥분상태 속에서 폭력을 휘두른 뒤 제정신을 차렸을 때 가해자가 자신의 행위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캐나다에서 70대의 한 노인은 공과금 청구서 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을 하던 중 홧김에 아내를 목 졸라 죽였다. 수십 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 부부싸움이라고는 거의 없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 사건이 있던 날 어떤 문제로 둘이 언쟁을 벌이다가 화가 난 아내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남편을 위협했다. 그러자 아내의 태도에 화가 극도로 치밀어 오른 그 노인은 순간적으로 아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기억은 딱 여기까지였다. 노인은 사건의 발단부터 아내의 목을 조르기 시작하던 시점까지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반면 그의 공격으로 아내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내는 이미 숨져있었다고 했다. 노인은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어떻게 죽였는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사건 당일 술에 취해 있지도 않았고 평소 기억상실과 연관된 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다. 이처럼 급격한 분노로 인한 레드 아웃 상태에서 발생하는 기억상실의 특징은 폭력행위 전후에 일어난 일은 생생하게 기억하면서도 폭력행위 자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폭력은 분노라는 감정에 실려 표출된다.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은 더욱더 그렇다.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장면을 봤을 때, 헤어지자는 애인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층간소음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항의하자 이웃이 적반하장 격으로 나올 때, 먼저 봐 둔 주차공간을 누군가 새치기할 때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경험한다. 상황이 언쟁 정도로 마무리될 때도 있지만 때때로 누군가 죽어야 끝날 때도 있다. 얼핏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되었더라도 일단 분노라는 뇌관을 건드리면 폭발의 규모는 예측불허가된다. 칼부림이 나기도 하고 불을 지르는가 하면 차를 몰고 인도로 뛰어들기도 한다.
범죄학자 잭 카츠(Jack Katz)는 분노로 야기된 폭력의 근원에는 ‘도덕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행위자가 자신의 폭력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폭력행위자의 입장에서 상대방은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고 거부한 자이다. 그로 인해 나의 체면과 명예는 짓밟혔고 존재로서의 정체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은 나에 대한 불의한 도전이고 나는 이러한 도전을 극복하고 주체적이고 고유한 존재임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폭력은 나를 지키려는 의로운 투쟁이고 타인의 부당한 침략에 대한 결사항전이다.
카츠는 도덕 감정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르는 자를 ‘의로운 살인자’(righteous slaughter)라고 부른다. 폭력의 시작은 항상 굴욕 경험이다. 자신이 맞닥뜨린 상황으로 인해 굴욕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형편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바람피운 아내를 마주 대하는 남자는 자신의 성적 능력이 의심되었다는 생각에 무력감을 느낀다.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가 땅에 내팽개쳐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굴욕은 수직으로 하강하는 느낌이다. 아래로 끌려 내려간 자신을 모든 사람들이 내려다보는 것만 같고 스스로가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여겨진다.
더욱이 자신을 모욕한 대상은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안전한 탈출구는 없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영원히 확정될 것만 같다. 자칫하면 죽는 순간까지 한낱 보잘것없는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범죄자들의 내면에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하는데 대한 두려움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고 밑바닥까지 자존감이 추락한 절망적 상태를 ‘제로상태’라고 부른다. 존재하고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은 상태이다. 제로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신의 보잘것없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또한 이들은 제로상태가 영원히 지속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이제 벼랑 끝에 선 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해야 할 상황이다. 자신을 향해 치켜든 상대방의 가운데 손가락을 꺾어야만 한다.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상대방의 도전을 물리치고 도덕적으로 손상을 입은 자아를 복원시켜야 한다.
굴욕감은 이제 분노로 전개된다. 굴욕감과 반대로 분노는 수직 상승하는 느낌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느낌이다. 몸 안에 있는 뜨거운 것들이 일제히 위를 향하고 급기야 ‘뚜껑이 열리고’ 가스가 머리 위로 분출한다. 그런데 이때 굴욕감에 추락하던 자아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위해서는 상승기류가 필요하다. ‘의로움’(righteousness)이 바로 상승기류의 역할을 한다. 한마디로 의로움은 ‘도덕적 원칙에 부합됨’을 의미한다. 행위자는 자신을 무력하고 초라한 상태로 몰고 가는 상황 속에서 어떤 도덕적 결함을 발견한다. 규범, 관습, 예의, 도리 등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보편적 도덕기준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이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분명히 잘못되고 부당하다고 느낀다. 나를 비참하게 만든 상대방은 간통을 저지른 부도덕한 자이고 신뢰를 저버린 자이며 무례한 이웃이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이다. 실제로 행위자가 느끼는 도덕 감정은 독선(self-righteousness)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 선이던지 독선에 불과하던지 분명한 점은 굴욕감이 의로움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분노의 단계로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고통스러운 굴욕의 나락에서 의로움이라는 도약대를 딛고 맹목적 분노의 상태로 뛰어오르게 된다.
분노는 상승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나의 자유와 주체성을 옥죄던 타인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상대방 위에 우뚝 서고자 하는 마음이다. 내려다보이는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위치로의 전환을 지향한다. 폭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나의 발아래에 굴복시키거나 굴욕의 근원인 타자를 아예 제거해 버린다. 그런데 사실 살인은 행위자가 애초에 의도한 결과와는 거리가 멀다. 분노가 폭발하면 모든 의식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상황에 쏠려 행동이 초래할 잠재적 결과를 인식하지 못한다. 레드 아웃 상태에 빠지면 분노는 모든 의식과 기억을 잠식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와 결과 사이에는 임의성과 우연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폭력행위의 궁극적 목적은 굴욕으로 인한 도덕적 상처를 치유하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구겨진 체면과 강등된 지위를 복원하는 것이다. 비록 잠깐 동안이겠지만 의로운 살인자는 굴욕으로 인한 내적 고통을 달래고 존재론적 안식을 맛본다.
영화 <로프> 속 필립과 브랜든은 동성애자로서 연인관계이다. 상류층 출신의 지적인 젊은이들로서 니체의 초인 사상에 심취해 있다. 어느 날 이들은 뉴욕 시의 한 아파트에서 대낮에 아무 이유 없이 친구를 목 졸라 죽인다. 그러고는 시체를 상자 속에 숨긴 채 아파트로 사람들을 초대해 칵테일파티를 연다. 초대된 사람들 중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약혼녀도 포함되어 있다. 필립은 파티에 모인 사람들과 대화를 하던 중 살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살인은 범죄가 되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은 살인의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견해를 펼친다. ‘살인면허’를 가진 소수의 우월한 자들에게 희생된 자들은 그저 열등한 존재들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필립은 일부러 시체를 담은 상자 위에 음식을 차리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상자 주위에 둘러서서 음식을 먹는다. 상자를 덮은 식탁보와 불을 밝힌 촛대는 마치 제단을 연상시킨다. 칵테일파티는 신께 올리는 제사이고 초청된 자들은 제사를 드리는 자들이다. 이쯤 되면 상자 속 희생자가 제물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필립과 브랜든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고 있으며 현재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 즉 전지전능한 신이다.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자기 극복의 의지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보다 고귀한 자가 되려는 초월을 향한 갈망이다. 니체는 그의 책에서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진정으로 고귀한 삶을 추구하는 자는 세상의 가치를 맹목적으로 좇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의지는 이와 같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 발현된다.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우월하고 고귀한 유형의 인간을 ‘위버멘쉬’라고 부르며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과 구별한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위버멘쉬는 평범한 자들 위에 우뚝 선 강자이며 지배자이고 주인이다. 주인에게서 나오는 도덕은 평범한 자들이 따르는 노예의 도덕과 구별된다. 노예의 도덕은 공포심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람을 악한 인간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주인의 도덕에 따르면 그러한 사람이 선한 인간이고 오히려 경멸스러운 존재는 약한 인간들이다. 약자들에게는 강자가 위험하고 무섭게 보일지라도 그 때문에 강자를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자는 어린양에게 위험하고 무서운 존재지만 아무도 사자를 악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표적을 지닌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상스럽다든가, 미쳤다든가, 위험스럽다고 여겨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닫고 있는 자들이었고 우리의 노력은 갈수록 완전해지는 깨달음을 위해 경주하는 데 있지만, 반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행복 탐구는 그들의 의견, 이상과 의무, 생활과 행복의 기준을 군중의 그것에 점점 더 밀착시키려고 애쓰는 데 있었다.
- 소설 데미안
소설 「데미안」 속에 등장하는 표적을 지닌 자들은 니체가 말한 우월한 자를 의미한다. 구약의 창세기에 카인은 동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질투해서 아벨을 살해한다. 하나님은 카인의 이마에 살인자의 표적을 부여하고 에덴동산에서 추방한다. 데미안은 이 사건이 카인이 범죄를 저지르고 심판을 받은 사건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를 죽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카인의 표적은 악한 자의 오명이 아니라 선악의 경계를 넘어선 초월자의 징표라는 것이다.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행위를 단순히 ‘무익하고 추하고, 해로운 이’ 한 마리를 죽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정신이 강한 자들만이 세상의 가치를 과감하게 무시하고 용감한 일들을 더 많이 감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바로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주권자이며 가치와 기준을 정하는 입법자라는 것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죽인 이유는 돈 때문도 아니었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스스로를 위한 행위였다. 자신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버러지 같은 존재’인지, 아니면 선악의 기준 저편에 존재하는 초월자인지 알고자 시험해 본 것이었다.
나는 그때 알고 싶었던 거야. 어서 알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이>인가, 아니면 인간인가를 말이야. 내가 선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니면 넘지 못하는가! 나는 벌벌 떠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
- 소설 죄와 벌
인간세상의 도덕기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이다. 그런데 냉혹하고 무분별한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신의 반열에 놓으려는 의식이 종종 발견된다. 2003년 불과 10개월 동안 20명을 살해한 유영철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쓴 자작시에서 스스로를 ‘징검다리 한 번에 건너뛰어 신의 영역까지 가려했던’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뛰어넘고 타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원했는지 모른다.
범죄학자 카츠는 냉혈 살인범들이 ‘원초적 악’(primordial evil)으로서의 모습을 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선과 악을 초월하고 우월한 힘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신성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신은 인간이 함부로 다가가거나 쳐다볼 수조차 없는 존엄한 존재로 여겨졌다. 이를 어긴 신성모독의 결과는 신의 분노와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준엄한 심판이다. 신은 명령하고 인간은 따를 뿐 신의 뜻을 인간이 이해할 수는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도 전적으로 신의 뜻에 달려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등장하는 킬러 안톤 쉬거는 원초적 악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쉬거는 소를 도축할 때 사용하는 에어건과 산소탱크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살해한다. 그의 앞에서 인간은 한낱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쉬거에게 툭 던진 질문 한 마디로 인해 주유소 주인은 생사의 기로에 선다. 남편이 쉬거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내는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죽음의 심판대에서 이들의 생사는 동전 던지기의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사 전체가 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동전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뜻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선다. 인간은 필연적 이유를 구하지만 모든 일이 우연의 결과처럼 보일 뿐이다. 죽음을 앞둔 피해자가 쉬거에게 자신이 굳이 죽어야 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항변한다. 쉬거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자꾸만 이유를 묻는 인간들을 한심해한다. 신의 명령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불필요하며, 설령 설명을 해준다고 해도 인간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츠는 냉혈 범죄자가 탄생하기까지 세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 있다고 설명한다. 주인공이 ‘버림받은 자’로 등장하는 게 첫 번째 단계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들은 범죄자의 표적을 지닌 채 세상을 떠돈다.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소년원이나 교도소에서 보내고 난 후 사회 속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대인관계 기술이나 직업적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범한 삶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인한 소외와 경멸은 더욱 견디기 힘든 부분이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범죄자는 순응의 압박과 초월의 욕구 사이에서 ‘도덕적 현기증’(moral dizziness)을 경험한다. 사회는 이들에게 세상의 관례에 따라 평범한 삶을 살라고 요구한다. 평범하게 행동하는 것은 세상의 권위와 원칙을 존중하고 규범적 기대에 부응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응의 요구에 대해 범죄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정신적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인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려고 관례를 좇아 살아가는 삶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삶이지 자신의 고유한 삶은 아니다. 자기 답지 않은 삶이고 비겁한 삶이다. 반면에 범죄자는 일탈행위 속에서 자기 다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또한 범죄자다운 삶이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게 만든다고 여긴다. 이제 범죄자라는 이마의 표적은 평범한 삶을 거부하며 공동체의 도덕을 초월한 자에게만 부여되는 명예로운 상징이 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범죄자는 존엄한 존재인 자신에게 합당한 경외심을 보이지 않는 세상을 응징하게 된다. 마침내 평범한 약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함으로써 초월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완성한다.
도덕적 초월을 향한 살인자들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무기력과 소외감에서 비롯되었다. 세상 속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결과다. 의로운 살인자들이 굴욕감으로 나락에 떨어진 자아를 의로운 분노로 구해내듯이 냉혈 살인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아를 과대하게 부풀려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국 구체적 세상 속에 발을 디디지 못한 채 추상적 자기 인식에 갇혀 버리고 만다. 현실세계와 더욱 멀어진 채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 신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모든 것은 살인자의 망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망상이 현실에서 구현될 때 우리는 이들이 벌이는 살육의 축제를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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