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범죄소년>
일탈은 사람이 저지르는 행위의 속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규칙과 처벌을 ‘위반자’에게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일탈자는 낙인이 성공적으로 부여된 사람이며, 일탈행위는 사람들이 그렇게 낙인을 부여한 행위이다.
- 하워드 베커
영화 <범죄소년> 속 장지구는 중학교 퇴학생이다. 엄마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른 채 병든 할아버지와 함께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다. 또래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고 소년원을 들락거리는 비행청소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지구가 아주 어릴 때 가출했다던 엄마가 갑자기 나타난다. 엄마는 십대에 미혼모가 되어 갓 나은 지구를 부모에게 맡기고 가출했다는 얘기를 들려준다. 현재는 범죄전과에 변변한 직업조차 없이 아는 동생에게 빌붙어 살고 있는 처지이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재회한 모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하지만 세상은 이들을 반겨주지 않는다. 학교에 복학하려 지구를 ‘소년원 갔다 온 놈’이라고 받아주지 않는다. 절도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집주인은 다짜고짜 지구를 도둑으로 의심한다. 엄마의 삶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중학생 아이를 둔 젊은 엄마에게 식당 주인은 석연찮은 표정을 지으며 일자리를 주려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한 번의 실수로 인해 그녀는 세상의 주변부로 내몰리고 말았다. 십대맘, 가출청소년, 그리고 전과자로 이어져온 오명의 궤적의 위에선 그녀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길은 너무도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설상가상 엄마가 지나온 바로 그 궤적을 아들 지구가 더듬더듬 따라오고 있는 것이다.
범죄학자 에드윈 레머트(Edwin Lemert)는 청소년들이 범죄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처음에 사춘기 청소년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일탈행위를 저지른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재미로 가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또래들에게 과시하려는 마음에 섣불리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 부모에 대한 반항심으로 덜컥 가출을 하며 성인범죄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기도 한다. 레머트는 이러한 일탈을 ‘일차적 일탈’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단계에서는 청소년들이 자신을 범죄자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런데 청소년이 범죄를 저지르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청소년에게 ‘범죄소년’, ‘범죄자’, ‘전과자’라는 낙인이 부여되고 청소년은 이에 반응하여 스스로의 정체성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세상이 부여한 낙인 그대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그에 부합되는 쪽으로 행동하게 된다. 문제아는 문제를 일으키고 비행청소년은 비행을 저지르는 식이다. 레머트는 청소년에게 위반자 낙인을 찍은 결과로 저질러지는 일탈을 ‘이차적 일탈’이라고 부른다. 일차적 일탈과의 차이는 이차적 일탈을 저지르는 청소년은 자신을 범죄자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범죄행위가 반복될수록 더 강한 처벌이 부과되고 더욱 진하고 뚜렷한 범죄자 낙인이 찍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초범에서 재범으로 그리고 전문 범죄자로 변해간다.
어떤 면에서 범죄는 청소년의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 사회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낙인이론 학자들은 청소년이 범죄소년에서 범죄자로 변천되는 과정을 사회 청중이 행위자에게 부여한 낙인의 결과로 해석한다. 범죄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S. Becker)는 범죄행위 속에 내포된 ‘자기실현적 예언’을 강조한다. 누군가를 범죄자라고 부르기 시작하면 그 대상은 점점 범죄자로 변해가고 범죄자라는 정체성에 부합하는 범죄행위를 자꾸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실현적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낙인찍는 자와 낙인찍히는 자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낙인찍는 주체는 전반적인 사회 청중인데 그중에서도 특히 경찰, 법원, 교정기관과 같은 공식적 사회통제기관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다. 이들 기관들에 의해 진행되는 형사절차는 사회규범을 어긴 일탈자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마크를 찍고 색을 덧입혀 범죄자를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범죄학자 프랑크 타넨바움(Frank Tannenbaum)은 이런 과정을 ‘악의 극화’(dramatization of evil)라고 부른다.
따라서 범죄자를 만드는 과정은 꼬리표를 붙이고, 정의하고, 확인하고, 격리하고, 묘사하고, 강조하고, 깨닫게 하고, 남을 의식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이렇게 우리가 책망했던 바로 그 특징들을 자극하고, 제안하고, 강조하고, 불러일으킨다..(중략). 그 사람은 자신이 묘사된 존재 그대로 된다.
- 프랑크 타넨바움
악의 극화를 통해 낙인찍힌 대상에게는 부정적 자아이미지가 형성되고 그 사람은 스스로를 범죄자와 동일시하게 된다. 낙인찍힌 자의 내면에 발생하는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아인식 차원의 변화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 외부의 반응에 따라 결정된다. 근데 어찌 보면 이런 변화과정이 과장된 주장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를 범죄자라고 부르면 갑자기 범죄자가 된다니? 그렇다면 같은 논리로 누군가를 천재라고 부르면 천재가 되고, 바보라고 부르면 바보가 되는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마법과 같은 이런 변화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자아로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모든 인간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사회공동체에 속한 이상 타인들과 완전히 유리된 채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주인공은 세계적인 택배회사 FedEx의 직원이다. 어느 날 그가 탄 비행기가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추락하고 무인도에 혼자만 살아남는다. 불을 피우고 먹거리를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생존 과정이 모두 힘들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힘겨운 점은 홀로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외로움을 달래 보려고 배구공에 사람 얼굴 모양을 그린 뒤 상품명을 따서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마치 윌슨이 사람인 양 말을 건네고 감정을 표현한다. 천신만고 끝에 뗏목을 타고 섬을 탈출하여 바다 위를 표류하던 중 풍랑을 만나는데 그 와중에 윌슨이 파도에 휩쓸러 떠내려가고 만다. 점점 멀어져 가는 윌슨을 속절없이 바라보며 주인공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처럼 오열한다.
왜 인간은 타인을 필요로 하는 걸까?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자가 한낱 사물에 불과한 배구공을 붙들고 감정을 교류하는 모습은 타인의 존재가 단순히 나의 생명 보호나 안전 확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에 대해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는 인간의 정신 자체가 ‘사회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과 사회적 경험을 통해 나중에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정신은 엄밀히 말해 개인에게 속한 속성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주장처럼 정신이 육체라는 기계를 떠다니는 영혼도, 신경과학의 관점처럼 뇌신경세포나 전달물질과 같은 물질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뿌리는 사회 속에서 찾아야 한다. 나의 정신은 내가 사회 공동체 속에서 삶을 영위한 결과물이다. 보다 정확히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얻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나의 정신의 근거이며 심지어 존재의 근거라고 말할 수 있다.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성찰하는 능력이다. 쉽게 말해 성찰하는 능력이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마치 타인에게 말을 걸듯이 자신을 향해서도 말을 걸 수 있다. 간혹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른 후 자책한 적이 있는가? 자책이란 문자 그대로 자신을 책망하는 행위이다. 타인이 취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스스로에게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찰의 능력은 다른 사람의 관점과 태도를 내면화하여 정신을 발달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다.
자기를 되돌아보는 바로 그 성찰 과정에 의해 개인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태도를 수용하여 의식적으로 그 과정에 스스로 적응할 수 있게 되며, 주어진 사회적 행위 안의 그러한 과정의 결과를 그에 대한 자신의 적응 측면에서 수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찰은 사회적 과정 안에서 정신의 발달에 본질적인 조건이다.
- 조지 허버트 미드
개인이 사회화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내면에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어 감을 의미한다. 미드는 사회적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자신의 부모나 형제와 같은 '특정한 타자'(particular others)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예를 들어, 엄마와 아빠가 어린아이들에게 보이는 기대나 태도는 자아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때 엄마와 아빠는 일반적인 부모가 아니라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특정한 부모이다.
두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사회적 자아는 현저히 발달하게 된다. 자아는 단순히 자신 주변의 몇몇 중요한 타자들의 태도만이 아니라 '일반화된 타자'(generaized others)의 태도 전체를 조직화한다. 일반화된 타자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취하는 역할과 태도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사회화 과정이란 바로 이러한 일반화된 타자가 개인의 사고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람은 보편적 사회규범과 관습을 내면화한다. 어릴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랫도리를 다 내놓고 돌아다니던 아이가 커가면서 사람들 앞에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일반화된 타자가 자아의 구성요소로 포함된 결과이다.
자아의 사회적 속성을 ‘거울 자아’(looking glass self)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들의 판단과 평가에 노출된다. 무수한 거울에 둘러싸인 스스로를 떠올려보자. 각각의 거울은 내가 일상적으로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다. 거울 속에는 그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손에 들린 거울 속의 내 모습이 흐릿해서 잘 안 보인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비칠지, 그런 모습에 대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스스로 상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에 대한 타자의 평가를 상상하면서 우리는 수치심, 굴욕감, 또는 자부심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예를 들어, 학교 성적이 변변치 않은 아이는 아빠의 거울을 보고 실망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을 남들 앞에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으로 여기는 아빠의 심정을 상상한다. 그 순간 수치심과 함께 원망의 감정이 마음속에 밀려든다.
거울 자아의 개념은 자아가 자신의 내면을 부지런히 들여다본다고 발견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한다. 전래동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새엄마 왕비는 날마다 마법 거울을 들여다보고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 묻고 또 묻는다.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왕비의 아름다움에 관한 진실은 오직 거울만이 알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은 우리에게 인간의 삶 자체가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라고 말해준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 의하면 인간이란 처음부터 텅 비어 있는 공허한 상태로 존재한다.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냥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 나의 존재는 단지 우연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 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성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 같은 도약 이후엔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 장 폴 사르트르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질이란 처음부터 없다. 세상에 존재론적 무(無)의 상태로 일단 등장한 것뿐이다. 그러고 나서 살아가면서 스스로 무엇이 되어가야 한다. 자신의 힘으로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인간 존재의 특징을 실존주의 제1원칙이자 ‘주체성’이라고 불렀다.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일은 타인에게 전가할 수 없는, 전적으로 주체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버즈는 자신이 우주의 악당들을 물리치는 최강의 전사로 믿고 있는 장난감이다. 그런데 어느 날 TV광고를 보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장난감들이 가게 진열대에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진다. 일순간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악의 무리와 싸우는 우주전사도, 평화를 지키는 영웅도 아닌 한낱 공장에서 찍어낸 장난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어떤 대단한 임무도, 반드시 이루어야 할 목적도 주어지지 않은 채 그저 세상 속에 내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타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데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바로 타자의 시선에 의해 바라보인-존재 그 자체이다. 타자는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내고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증해야 할 멍에를 짊어진 주체에게 타자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이다.
나에 대한 어떤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이처럼 내가 타인을 거쳐야만 합니다. 타인은 나의 실존에 필수적이며, 내가 나에 대해 갖게 되는 앎에도 마찬가지로 필수적입니다.
- 장 폴 사르트르
영화 <보이 A>의 주인공은 열 살 때 친구와 함께 우발적으로 어린 소녀를 살해한다. 14년 동안의 소년원 복역을 마치고 스물네 살의 청년이 되어 출소한다. 잭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낯선 곳에 정착하여 배달부로 일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 친구들도 생기고 여자 친구도 사귀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안정을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위험에 빠진 여자아이를 구해낸다. 마을 사람들을 그의 용감한 행동을 칭찬하며 그를 영웅이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소문이 퍼져 잭에 관한 신문기사가 나가자 그의 과거 행적이 세상에 드러나고 만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에게서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마을 사람들은 그를 향해 분노와 두려움을 표출한다. 친구들도 모두 그를 외면하고 급기야 사랑하는 여자 친구마저 그를 떠난다. 한때 잭은 성실함과 순수함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던 존재였다. 하지만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지 않는다. 세상은 잭을 향해 증오심 가득한 목소리로 ‘너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야’라고 소리친다. 세상 사람들의 손에 들린 거울 속에서 잭은 냉혹한 살인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할 수 없는 자이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영영 거부된 자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타자는 자아를 형성하고 주체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인간은 타자들에 둘러싸여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정신이 완성될 수 있다. 따라서 타자들로부터 격리된 자는 불완전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잭이 오랜 세월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것은 단순히 수용시설 안에서 밖으로의 공간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잭에게는 ‘존재론적 전환’에 해당하는 사건이다. 비로소 타자들과의 의미 있는 사회적 관계 속으로 진입하여 자아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호칭의 변화는 한 청년에게 닥친 존재론적 전환을 암시한다. ‘보이 A’는 미성년 범죄자의 신상을 보호하기 위해 부여된 일반적 호칭으로서 존재에 고유한 의미가 부여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러나 교도소를 벗어나면서 보이 A는 잭이 되었다.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로의 변화이다. 장난감 가게 선반에 위에 놓인 상품에서 최강 우주전사 버즈 라이트이어로의 변화이다.
그런데 타자는 나의 존재 근거를 마련해주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와 갈등관계에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타자는 바라봄으로써 나를 강제적으로 ‘무엇’으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다. 타자의 시선은 나로부터 주체성을 빼앗아 가고 나를 객체화하고 대상화한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이러한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수치심을 느끼는 경험을 예로 든다. 혼자서 은밀하게 남의 방을 훔쳐보면서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에게 자신의 그런 모습을 들키면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이 밀려와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혼자 있을 때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타자가 등장하면 나의 세상은 그의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나는 한낱 바라보이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의 눈과 마주쳤을 때 돌이 되어 버리듯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물과 같은 객체로 만들어 버린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남의 방을 몰래 훔쳐본 나 자신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드러나 있는 나의 모습이다. 그의 시선에 포획된 채 나는 이상한 놈, 변태, 관음증 환자로 굳어져간다. 전에 한 번도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바라보는 존재이고 나는 바라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나는 주체성을 둘러싸고 투쟁을 벌이는 경쟁관계에 놓여있다. 주체들 간의 이러한 갈등은 사르트르가 쓴 희곡 <닫힌 방>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야기 속에는 죽은 세 남녀가 등장하는데 모두 한 방에 갇혀 있다. 그곳에는 처음 만나게 된 이들은 시간이 흐르고 점차 서로를 알게 되자 상대방을 헐뜯기 시작한다. 나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없고 영원히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미 죽은 몸이라 다시 죽을 수도 없다. 닫힌 방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타자의 시선을 피할 방법이 없는 공간을 의미한다. 결국 주인공 가르생은 ‘타인들이 바로 지옥’이라고 외치고 만다. 영원토록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판단을 받아야만 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곳에서 나는 주체성을 빼앗기고 타자에 의해 어떠한 무엇으로 규정된 채 스스로를 망각해 간다.
나를 잡아먹는 이 모든 시선들을..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도 생각나지, 유황불, 장작불, 석쇠... 아! 정말 웃기는군, 석쇠도 필요 없어,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 「닫힌 방」
타자는 이중적 의미를 간직한 존재다. 일차적으로 타자는 나의 정신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의 근거다. 미드의 주장처럼 정신은 타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타자들의 손에 들린 거울에 스스로를 비추어 봐야만 한다. 나에 관한 비밀을 간직한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도무지 내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자는 나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는 존재이다. 바라보는 행위로 나를 하나의 객체로 끌어내리고 동시에 나의 자유와 모든 가능성을 응고시켜 버린다. 그래서 타자와 나는 주체의 지위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 A>에서 잭의 소년원 출소는 이러한 딜레마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잭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참여해야만 했다. 하지만 동시에 타자들의 시선으로 인해 주체성과 자유를 강탈당할 위험 역시 감당해야만 했다. 결국 잭의 끔찍한 과거가 밝혀지게 되면서 세상은 순식간에 그에게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잭을 향해 터뜨리는 사람들의 시선 아래에서 주체로서의 자격을 강탈당하고 살인자로 객체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그가 세상 사람들의 무자비한 시선으로부터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세상 전체가 잭에게는 닫힌 방이 되고 만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잭이 출소할 때 평소 그를 아들처럼 돌봐주던 보호관찰관이 나이키 운동화 한 켤레를 선물하는 장면이 나온다. 잠시 후 카메라가 운동화를 향해 줌인하더니 운동화에 찍힌 ‘ESCAPE’(탈출)라는 모델명 위에 멈춘다. 14년 동안 잭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던 소년원이라는 공간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듯싶었다. 소년원을 빠져나온 잭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또다시 탈출구 없는 공간, 타인들의 시선 속에 갇혀 버리고 말았다.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나버렸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스티그마(stigma)는 노예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 몸에 새겨진 표시나 낙인을 의미했다. 오늘날에 와서 스티그마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특정인들에게 부여된 치욕스럽고 불명예스러운 특성을 의미한다. 단어에 담긴 의미가 다소 변했지만 공통점도 있다. 스티그마가 부여된 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구별하고, 멀리하며, 마치 다른 부류에 속한 존재처럼 여긴다. 스티그마를 가진 자는 무리로부터 배척된 아웃사이더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일단 한번 부여된 스티그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특성을 가진다. 몸에 새겨진 문신을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것처럼 누군가에게 부여된 오명도 여간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영화 <더 헌트>의 주인공 루카스는 유치원 선생님이다. 착한 성품 덕에 아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고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를 좋아한다. 어릴 적부터 같은 마을에서 함께 자라온 친구들과의 친분도 두텁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평소 루카스를 좋아하던 어린 소녀 클라라가 충동적으로 그의 입에 키스를 한다. 클라라는 루카스의 가장 친한 친구 테오의 딸이다. 루카스는 클라라의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신의 애정표현이 거부당한 데에 화가 난 클라라는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 선생님의 ‘고추’가 막대기 같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원장은 클라라의 말만 믿고 성적학대를 의심한다. 학부모회의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급기야 루카스는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재판에 넘겨진다.
금방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그를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루카스를 향해 혐오의 눈빛을 쏟아낸다. 슈퍼마켓 주인은 물건을 팔지 않겠다며 그를 가게에서 내쫓는다. 어릴 적부터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도 그를 슬금슬금 피한다. 심지어 애인마저도 그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그는 예전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루카스가 아니었다. 온몸이 스티그마로 얼룩져버렸다. 친구의 어린 딸을 성추행한 파렴치범이란 오명으로 더럽혀졌다.
영화의 전반부에는 루카스의 성품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여러 번 등장한다. 유치원생들과 천진난만하게 놀아주는 모습, 거리낌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모습, 엄마와 아빠의 말다툼에 풀이 죽은 클라라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 그리고 술 취한 친구를 짊어지고 집에까지 데려다주는 모습 등은 그가 얼마나 자상하고 배려심이 깊은지를 잘 나타낸다. 또한 주변 사람들이 루카스를 대하는 태도 속에서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인정하고 있는지도 확연이 드러난다. 그런데 철없는 어린 소녀의 말에서 비롯된 오해는 한순간에 모든 걸 바꿔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곁에 다가가면 무슨 몹쓸 병이라도 옮을 것처럼 그를 피하고 배척했다.
루카스가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하려고 성당에 들어서는 장면은 변화한 사람들의 태도를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신약성경에는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유태인들을 향해 예수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루카스는 스티그마로 더럽혀진 자였고 성서 속의 간음한 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타인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명령한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루카스를 향해 경멸과 혐오의 돌을 던진다.
주변 사람들의 돌변한 태도를 보면 마치 완전히 다른 두 명의 루카스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아동 성추행범 스티그마가 부여되기 이전과 이후의 루카스는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대상을 지각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lomon Asch)는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갖게 되는 과정을 밝히기 위해 흥미로운 실험을 실시했다. 피험자들을 A집단과 B집단으로 나눈 뒤 어떤 가상인물의 성격을 표현하는 몇몇 단어들을 보여줬다. A집단에게는 ‘지적인’, ‘능숙한’, ‘근면한’, ‘다정한’, ‘결연한’, ‘실제적인’, ‘주의 깊은’의 총 7개의 단어를 제시하였고, B집단에게는 ‘다정한’을 ‘냉정한’으로 교체하고 나머지 단어를 보여줬다. 그런 뒤 두 집단에게 각각 가상인물에 대한 인상을 서술해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불과 단어 하나의 차이였지만 두 집단의 평가는 엇갈렸다. A집단은 대상 인물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B집단은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번에는 서로 상반된 의미의 단어들을 여러 쌍 제시하고 어떤 단어가 가상인물을 묘사하기에 더 적절한지 고르도록 하였다. 그랬더니 A집단은 긍정적 단어를, B집단은 부정적 단어를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관대한-인색한’ 단어 조합에서 A집단의 91%가 ‘관대한’을 선택한 반면 B집단의 92%가 ‘인색한’을 골랐다.
애쉬의 실험 결과는 인간의 지각 방식에 대한 비밀 하나를 우리에게 알려줬다. 누군가에 대한 인상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어떤 특정한 성격 특질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점이다. 가상인물에 대한 두 집단의 인상은 제시된 7개 성격 특질을 합산하여 평균한 결과가 아니다. ‘다정한’과 ‘냉정한’이 인상형성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다. 이에 반해 성격을 나타내는 나머지 단어들은 그에 대한 인상형성에 있어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쳤다. 더욱이 ‘냉정한’을 중심으로 고착화된 부정적 인상은 추후 같은 대상에 대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막연히 그가 인색하고, 유머감각이 떨어지고, 사교성이 부족하고, 자기중심적일 거라고 평가하였다 애쉬는 ‘다정한-냉정한’처럼 관념적 설정을 만들거나 후광효과를 일으켜 대상에 대한 평가에 지속적으로 플러스 또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는 특질을 ‘중심 특질’(central quality)라고 불렀다.
애쉬의 실험 결과는 게슈탈트 심리학(또는 형태 심리학)의 지각이론으로도 설명해 볼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지각할 때 개별적인 요소들을 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적인 형태로서 지각한다고 본다. 이렇게 지각되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태를 독일어로 ‘게슈탈트’(gestalt)라고 한다. 게슈탈트 지각 원리는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다’라는 명제로 대표된다. 예를 들어, 달리고 있는 말을 카메라로 연속 촬영한 뒤 시간 순서에 따라 앞 사진에서 다음 사진으로 빠르게 넘기면 마치 말이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여러 장의 사진을 순차적으로 보여 준 것에 불과하지만 각각의 사진 속 장면들이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연속동작으로 지각된다.
전광판 위의 전구들은 실제로 번갈아가면서 점멸하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빛이 움직인다고 지각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영화 속에서 사용되는 몽타주 기법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 <전함 포템킨>의 유명한 오데사 계단의 장면은 주민들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장면 사이사이에 계단을 타고 아기를 실은 유모차가 아슬아슬하게 굴러 내려오는 쇼트를 삽입되어 있다. 관객들의 마음에 긴박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기법이다. 이처럼 학살 장면과 굴러 떨어지는 유모차라는 서로 다른 쇼트가 결합할 때 제3의 의미를 파생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인상을 가질 때에도 그 사람에 관한 개별적 정보들을 단순히 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대상을 지각하게 된다. 이때 투입된 정보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능동적인 재구성과 재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애쉬의 실험에서 피험자들이 대상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제시된 일곱 개 단어들이 단순히 합해지는 산술적 과정이 아니다. ‘다정한-냉정한’이라는 중심 특질의 지배적 영향 아래에서 의미들 간의 이합집산이 복잡하게 발생하는 유기적 과정이다.
스티그마는 애쉬가 말하는 중심 특질이다. 영화 <더 헌트>에서 ‘아동 성추행’이라는 스티그마는 루카스에 대한 이전의 모든 좋은 평판을 뒤덮어 버릴 만큼 강력했다. 친절하고, 의리 있고, 사려 깊은 그의 훌륭한 성품들은 아동 성추행이라는 스티그마 앞에서 한순간에 빛을 잃고 말았다. 스티그마를 중심으로 루카스라는 존재는 재창조된다. 과거에 그가 보여준 행동들이 재해석된다. 아이들에 다정다감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가 아이들과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노는 장면과 순진한 아이들을 성추행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교차 편집되면서 루카스는 위선적이고 뻔뻔한 파렴치한 루카스가 파생되어 나온다.
게슈탈트 지각 원리 중 전경과 배경이라는 개념이 있다.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Edgar Rubin)은 두 영역이 경계선을 맞대고 있을 때 하나는 형태로, 다른 하나는 배경으로 보이는 지각분리 현상을 연구했다. 루빈은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했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루빈의 컵’이 있다. 보기에 따라 컵 같기도 하고 마주 보는 사람 얼굴 같기도 한 그림이다. 이처럼 분명한 형태를 갖추고 앞으로 부각되어 보이는 영역이 전경이고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뒤에 남겨지는 것처럼 보이는 영역이 배경이다. 그런데 주의의 초점을 바꾸면 처음에 전경이던 대상이 배경이 되어 가라앉고, 배경은 전경이 되어 떠오르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인간이 동시에 모든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처한 상황이나 관심에 따라 특정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두 번 해봤을 것이다. 공연을 하려고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수십 명의 아이들 중에서 유독 내 아이만 눈에 쏙 들어오고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흐릿한 배경처럼 보이는 걸 말이다.
솔로몬 애쉬의 실험에서도 피험자들에게 제시된 형용사들 중에서 ‘냉정한’은 전경이 되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인식되었다. <더 헌트>에서도 루카스를 묘사할 수 있는 수많은 형용사들이 존재하지만 중심 특질인 아동 성추행이 전경이 되어 두드러지게 보이고 나머지들은 배경이 되어 멀찌감치 물러나 버린 것이다. 루빈의 컵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컵이 사라져 버리듯 루카스에게 들러붙은 아동 성추행 스티그마를 발견하자 나머지 그의 모습들은 저 멀리 배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스티그마는 어떤 대상을 판단할 때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한번 각인된 스티그마는 웬만해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로젠한(David Rosenhan)은 정신병 환자라는 낙인의 효과를 밝히기 위해 한 가지 매우 도발적인 실험을 실시했다. 먼저 자신을 포함하여 총 8명의 가짜 정신병 환자를 각기 다른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가짜 환자들은 입원을 위해 머릿속에 텅 빈 소리와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는 거짓말로 병원을 속였다. 하지만 일단 병원에 입원한 뒤에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멈추고 최대한 협조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병원 측에 자신이 정상이라고 꾸준히 설득했다. 그러나 이들의 말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한 명을 제외한 모든 가짜 환자들이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이들 가짜 환자들이 퇴원에 성공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최소 7일에서 최장 53일이었고 평균 입원기간은 19일이었다. 퇴원이 허락된 사유도 정상이어서가 아니라 증상이 완화되어서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들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되지도 부정되지도 않았다. 로젠한의 실험은 낙인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고 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한번 정신분열증 환자로 규정된 이상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정신분열증이라는 꼬리표는 병원 직원들이 환자들을 바라보는 방식 완전히 바꿔놓는다. ‘미친’이라는 형용사는 워낙 강력한 중심 특질이기 때문에 대상을 판단하고 그의 행위를 해석할 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로젠한의 실험에서는 정신병 스티그마의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 가짜 환자들의 극히 정상적인 행동들이 종종 비정상적이라고 해석되었다. 어떤 환자의 경우 어릴 시절 엄마와는 가깝게 지낸 반면 아빠와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춘기 이후부터 아빠와는 친구처럼 지냈지만 반대로 엄마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환자는 현재 아내에 대해서는 어쩌다 화를 내고 다툴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부부관계가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자녀들을 체벌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고 했다. 가짜 환자에 대한 이러한 환경정보를 기초로 정신병원 측은 다음과 같은 진단 결과를 내놓았다.
여기 39세의 백인 남성은... 친밀관계에 있어서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상당한 수준의 양가감정을 보였다. 모친과의 애정 어린 관계가 사춘기 동안 식어버렸다. 부친과의 소원한 관계가 매우 강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서적 안정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 자녀들에 대해 감정을 자제하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아이들의 경우 체벌을 가하면서 중단되어 버린다. 좋은 친구가 몇 명 있다고는 하지만 친구관계에서도 상당한 양가감정이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환자의 생활환경에 대한 정보를 근거로 병증에 대한 진단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진단을 바탕으로 환자의 생활환경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부여된 정신분열증이라는 낙인과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례에 대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환경에서는 이상하게 보일만한 행동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고, 반대로 평범한 행동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병원 내의 가짜 환자들은 개방된 공간에서 자신들이 관찰한 내용을 쉬지 않고 노트에 적곤 했다. 충분히 궁금증을 자아낼만한 행동이지만 간호사들은 단지 정신병증으로 인한 이상행동으로 간주하고 단 한 차례도 무엇에 대해 쓰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한 번은 한 가짜 환자가 좁고 기다랗게 복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가 다가와 친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안하세요?” 그러자 환자가 대답했다. “아뇨, 그냥 지루해서요.”
<더 헌트>의 후반부에서 루카스는 재판을 거쳐 다행히도 모든 누명을 벗고 마을로 돌아온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를 향한 사람들의 돌팔매질은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가 루카스의 집 창문에 돌을 던지고 그가 키우던 애완견을 목매달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지인들과 화해하고 상처 입은 관계가 회복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숲에서 사냥을 하던 루카스를 향해 누군가가 총을 쏜다. 그를 향한 세상의 경고였다. 너는 여전히 스티그마를 지닌 자이고 우리는 아직 널 받아줄 마음이 없다는 메시지였다. 더러운 흔적은 그에게 끈질기게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질 않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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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L. Rosenhan, “On being Sane in Insane Places,” Science, Vol. 179(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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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omon Asch, “Forming Impressions of Personality,” The Journal of Abnormal and Social Psychology, Vol. 41, No. 3(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