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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폴 Oct 19. 2020

범죄라 쓰고 자유라 읽기

영화 <몬스터>

내가 햄을 먹을 때 취할 수 있는 쾌락과 내가 당신을 강간하고 죽일 때 기대되는 쾌락 사이에는 절대적으로 그 어떤 차이도 없소. 


- 테드 번디



영화 <몬스터>의 주인공 에일린 워노스는 불행한 과거를 가진 여성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아버지의 친구에게는 성폭행까지 당했다. 열세 살에 미혼모가 되었고 낳은 아기는 곧바로 입양되었다. 아버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나자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성매매를 시작한다. 또래 친구들은 그녀를 창녀라고 놀려대고 동생들도 그녀의 존재를 부끄러워했다. 가족에게 크게 실망해 집을 떠나게 되고 플로리다 해안가 일대를 중심으로 고속도로변에서 성매매를 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날 성매매 도중 자신을 강간하려던 남성을 총으로 쏴 죽인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에일린은 술집에서 만난 셀비라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그녀를 의지한다. 이제 에일린은 거리생활을 청산하고 번듯한 직장을 구해 셀비와 함께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학력도 경력도 없고 가진 거라고는 전과밖에 없는 그녀에게 아무도 일자리를 주려고 하지 않는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에일린은 결국 길거리로 다시 내몰리고 그녀의 살인행각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매매를 미끼로 남성들을 숲 속으로 유인한 뒤 차례차례 총으로 쏴서 죽이고 돈과 자동차를 빼앗는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셀비는 그녀를 떠나고 에일린도 경찰에 붙잡힌다. 

  

영화는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발생했던 실제 연쇄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범인이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에일린 워노스에게는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그동안 대부분의 연쇄살인사건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종종 피해자로 등장하였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사건에서는 살인범이 성매매 여성이었다. 그녀는 중년 남성들만을 골라서 범행을 저질렀는데 마치 즉결처분하듯이 피해자들을 총살했다. 재판 과정에 자신을 강간했던 첫 번째 피해 남성을 포함하여 그동안 자신이 만난 남성들에 대해 심한 적대감과 혐오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녀가 증오했던 대상이 단지 남성들만은 아니었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원칙들이 그녀에게 역겨우리만큼 혐오감을 유발했다. 

  

영화 속에서 에일린은 세상을 어린 시절 놀이동산에서 타 봤던 회전 관람차에 비유한다. 사람들은 회전 관람차를 ‘몬스터’라고 불렀는데 울긋불긋 네온사인 장식을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이 어린 에일린의 눈에는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빨리 타보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회전 관람차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타고 보니 너무 무섭고 멀미가 났다. 한 바퀴도 채 돌지 못하고 구토를 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세상은 회전 관람차처럼 괴물이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면 구역질을 일으킬 만큼 어지러운 게 바로 세상이다. 


세상의 도덕률과 결별하는 에일린 - 영화 <몬스터>

  

에일린은 셀비에게 자신이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경우라도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셀비가 반박하지만 에일린은 동의하지 않는다. 말로는 ‘살인하지 말라’고 떠들어대면서 실제로는 매일같이 정치적 목적, 종교적 이유, 스스로 영웅이 되기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게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살인을 금지한 신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에일린은 자신이 열세 살 때 어떤 성공한 드럼 연주자의 강연을 들었던 일을 떠올린다. 그때 드럼 연주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게 사랑과 자신감이라 말했고 그 말을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었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세상이 결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도덕적 원칙은 그저 미사여구이고 빛 좋은 개살구이며 기껏해야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에일린은 일종의 ‘도덕적 현기증’을 경험했다. 도덕적 원칙과 부도덕한 현실의 고도 차이는 어지럼증과 구토를 일으켰다. 탈출구는 세상의 도덕률과의 결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살인행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세상의 도덕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던 것일까? 어느 날 도로변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다가 한 남성의 차에 타게 되는데 그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에일린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런데 에일린이 실수로 총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살인자의 신분이 들통났고 할 수 없이 그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마지막 죽는 순간 그 남성은 울부짖으며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그리워한다.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눈 에일린의 손이 주저함에 떨린다. 하지만 목격자를 살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에일린은 선량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한다.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옛날 옛적 리디아라는 나라에 가이게스라는 양치기 소년이 살았다. 어느 날 동굴 속에서 우연히 마법의 반지를 줍는다. 반지의 흠집 난 곳을 돌리면 다른 사람들이 반지의 주인을 볼 수 없게 된다. 가이게스는 반지의 능력을 이용하여 몰래 궁궐에 들어가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왕비를 유혹한다. 급기야 왕비와 짜고 왕을 암살한 후 스스로 리디아의 왕좌에 오른다. 플라톤이 쓴 ‘국가론’에 소개된 이야기이다. 플라톤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왜 우리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금지된 행위를 하더라도 처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도덕적 원칙을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당신이 마법의 반지를 지닌 가이게스라면, 그리고 아리따운 왕비에게 매혹되었다면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어릴 적 투명인간이란 존재는 무한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다. 당시 아이들은 투명인간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손가락으로 꼽아보며 설레어했다. 투명인간이 매력적인 이유는 어떠한 제약에도 구속받지 않고 금기의 영역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영화 <할로우 맨>은 미국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투명인간이 된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몸이 투명해졌다는 사실에 잠시 동안 당황하지만 이내 새로이 얻게 된 엄청난 능력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능력을 깨닫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다름 아닌 범죄였다. 거칠 것이 없어진 주인공은 평소 아파트 창문을 통해 눈여겨봤던 이웃의 한 여성을 찾아가 성폭행한다. 또한 자신을 배신한 전 여자 친구를 찾아가 강간하고 새 남자 친구인 동료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비단 영화 속에서만 일어날까? 허리케인,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도시가 제 기능을 못할 때면 어김없이 약탈, 살인, 강간이 등장하는 걸 보게 된다. 대규모 폭동과 시위로 치안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약탈과 방화가 급증하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전시상황만큼 도덕성의 한계를 붕괴시키는 조건은 없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일본의 난징대학살과 위안부, 크메르루주 정권의 킬링필드, 보스니아 전쟁의 인종청소, 르완다 대학살, 그리고 근래에 벌어진 미얀마의 로힝야족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처참히 짓밟힌 도덕률 위에서 극단적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을 그동안 수없이 봐왔다.   

  

일찍이 중국의 사상가 순자가 인간 본성이 악하다고 설파했고 이후 여러 학자들이 비슷한 견해를 내놨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을 위선적이고 물욕에 눈이 먼 속물들로 묘사한다. 토마스 홉스는 자연 상태 속 인간이 타고난 이기적 욕심 때문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인간관을 제시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 역시 인간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규범으로 잘 통제하지 않으면 자칫 무규범 상태, 즉 아노미에 빠진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에서는 악한 본성의 뿌리를 세상이 창조되던 시점에서 찾는다. 태초의 인간은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 원죄를 저질렀는데 바로 그 순간 죄의 씨앗이 인간 내면에 잉태되었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영역의 이드는 이러한 죄의 씨앗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이라 말할 수 있다. 

  

인간 본성이 이와 같다면 어쩌면 범죄는 본성에 충실한 결과일 뿐이다.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악한 본성의 요구대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일차적으로 범죄행위가 발각되었을 때 감수해야 할 비난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다.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 높이 솟은 담 하나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그 담의 이름은 바로 도덕이다. 도덕에는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완전범죄 상황에서조차 행위자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영화 <범죄와 비행>은 완전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한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안과의사인 주다 로젠탈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으로부터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로젠탈이 이혼을 하고 자신과 결혼해주기를 원하지만 로젠탈은 그럴 마음이 없다. 그녀로 인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괴로워하던 로젠탈은 급기야 동생을 시켜 정부를 살해한다.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형에게 동생은 아무런 증거나 증인도 남지 않은 완전범죄라는 점을 강조하며 안심시키려 한다. 하지만 로젠탈은 신이 자신을 감시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온 세상이 도덕률로 가득 찬 것처럼 느낀다. 어린 시절 유대교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마음 깊이 내재된 ‘놀랍게 꿰뚫어 보는 맹렬한 신의 눈’이 그를 자꾸 괴롭힌다. 급기야 공황상태에 빠진 나머지 경찰에 자수하기 직전까지 간다. 이런 로젠탈의 모습은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꼴리니코프와 많이 닮아있다.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후 라스꼴리니코프는 죄책감으로 인해 서서히 정신이 무너져 내렸고 자살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제 발로 경찰서를 찾아간다. 니체 식으로 말하면 스스로 초인이라고 자처했지만 ‘약자의 도덕’ 앞에 굴복하고만 것이다.


"한 달이 지나도 처벌을 안 받는 거죠." - 영화 <범죄와 비행>

  

그러나 <범죄와 비행>은 영화 후반부에 극적인 반전을 보여준다. 로젠탈은 파티에서 만난 한 영화감독에게 남의 이야기인 양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청부살인으로 인한 죄책감이 최고조에 이르고 정신이 거의 붕괴될 지경이 될 즈음 그에게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처음 상태로 돌아오고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났는데 태양은 빛나고 가족이 곁에 있고 이상하게도 위기가 사라졌어요. 한 달이 지나도 처벌을 안 받는 거죠. 그는 처벌을 면했죠. 삶이 정상으로 돌아왔어요. 가끔 괴로운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냥 지나가버리죠.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져요. 

- 로젠탈의 고백, 영화 ‘범죄와 비행’

  

로젠탈은 영화감독에게 착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는 일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며 현실은 다르다고 말해준다. 현실은 도덕률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란 뜻이다. 로젠탈을 계속 노려보던 신의 눈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로젠탈은 도덕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아니 어쩌면 신의 눈으로 상징되는 도덕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도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 니체가 말한 ‘선악의 저편’에 도달한 셈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기준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의 말처럼 ‘신은 이미 죽었고’ 인간이 의지할만한 절대가치는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자유와 선택이다. 신이 없는 상황에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자유로운 주체로서 스스로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선택하면 된다. 애초부터 인간은 세상에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 내던져진 존재이다. 존재의 의미도, 삶의 지침도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갈 뿐이다. 우리 자신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만약 인간에서 부여된 의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 의무를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말로 표현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는 이미 사람들의 행위를 제약하는 도덕적 원칙이란 게 있지 않은가? 니체는 이러한 세상의 도덕이 기껏해야 기독교 전통을 기반으로 한 노예의 도덕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순응, 겸손, 근면과 같은 피지배자의 덕목을 중요시하는 노예 도덕은 지배자들에 대한 공포심과 경계심에서 출발했다. 피지배자들은 주인이 갖춘 고귀함, 강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원망하고 질투하는데 노예 도덕은 바로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정신에서 파생된 병든 도덕에 불과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인간이란 이러한 세상의 도덕과 풍습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주권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법의 속박을 던져 버릴 만큼의 대담함과 용감함 – 성격의 강인함 –을 지난 나 같은 사람이 법에 복종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소... 나는 나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진정으로 거리낌이 없어야 함을 깨달았소. 그리고 나는 나의 자유에의 최대의 장애물, 최대의 방해물과 한계는 내가 타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가치판단이라는 것을 재빨리 발견했소.

-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 

  

모든 도덕 원리가 개별 행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주장은 도덕 상대주의와 일맥상통한다. 도덕 상대주의에 의하면 도덕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준칙이 아니라 전적으로 행위자의 주관에 속한 판단기준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도덕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처럼 ‘도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좋게 느끼는 것이요 부도덕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나쁘게 느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살인행위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그 행위를 나쁘다고 받아들여야 나쁜 것이 될 뿐이다. 

  

<범죄와 비행>에서 로젠탈의 이모는 ‘돌에 새겨져 내려온 도덕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구약성경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 누군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용케 붙잡히지 않고 죄책감으로 인한 심적 고통만 잘 이겨낸다면 바로 그 사람이 승자라고 말한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 따윈 없기 때문에 이에 얽매일 이유도 없다. 이제 남은 건 행위자가 도덕이라는 담을 뛰어넘고 자유로운 세계에 편입되는 일뿐이다. 그곳에서 자연의 소리에 따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일만 남았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영화 <다크 나이트>의 주제는 선을 상징하는 배트맨과 악을 상징하는 조커 간의 치열한 대결이다. 조커는 사회를 혼돈상태로 빠뜨리기 위해 세상의 도덕기준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반면 배트맨은 자신의 신념과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조커의 인질극으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게 되자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신분을 노출하기로 결심한다. 조커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도 살인은 안 된다는 원칙을 지키려다 번번이 악당을 놓치고 만다. ‘괴물을 잡기 위해 나까지 괴물이 될 수는 없다’는 배트맨의 말은 그가 신봉하는 도덕적 원칙을 대표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게 도덕은 의무의 문제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도덕을 인간 내면에 울려 퍼지는 준엄한 목소리로 경험한다.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개인적인 욕구와 이익에 구애받지 말고 오로지 옳은 일을 행하라고 명령한다. 아무런 조건이 수반되지 않는,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명령, 즉 ‘정언명령’(定言命令)이다. 칸트는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가 원하는 무엇이 모든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거짓말을 하는 게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걸까? 칸트의 원칙을 따르면 거짓말하는 행위가 보편적 원칙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다. 내가 거짓말하듯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거리낌 없이 서로에게 거짓말하는 상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칸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고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말한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때 인간성 자체가 훼손되거나 부정된다. 영화 <실미도>는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가 만든 테러조직에 관한 이야기다. 부대원들은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을 목표로 지옥훈련을 거쳐 단기간 내에 인간병기가 된다. 하지만 남북 간의 분위기가 화해 쪽으로 흘러가자 인간병기들은 불필요한 존재가 되고 결국 국가에 의해 무참히 제거된다. 복제인간에 관한 영화들도 비슷한 도덕적 쟁점을 다루고 있다. 영화 <아일랜드>나 <네버 렛 미고>는 인간의 생명연장과 질병치료에 쓰이기 위해 복제인간을 양성하고 있는 미래사회를 그리고 있다. 복제인간들은 오직 고객이나 주인의 몸을 위한 장기적출용으로 사용된 후 폐기된다. 칸트의 의무론을 따르면 인간병기나 복제인간 모두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칸트는 인간이 가진 도덕성의 원천을 자유의지에서 찾는다. 인간이 자연의 다른 존재들과 구별되는 이유도,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동물들은 본능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은 이성과 양심의 소리에 따라 자유의지의 능력을 사용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도덕적이어야 할 당위가 있다. ‘왜 인간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칸트는 ‘인간이기 때문에’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중적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닌 존엄한 존재인 동시에 자연적 존재이기도 하다. 본능적으로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싶고 누가 손해를 끼치면 화가 난다. 인간 심리의 자기 중심성은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는 것처럼 본능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놔두면 인간의 마음은 저절로 이기적인 쪽으로 기울게 되어있다. 칸트는 이러한 심리적 속성을 ‘경향성’이라고 불렀다. 경사면에 놓인 공이 저절로 바닥을 향해 굴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이 도덕적으로 되고자 한다면 이러한 자연적 경향성을 의지적으로 거슬러야만 한다. 매 순간 본능에서 비롯된 욕구와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과 일맥상통한다. 자연의 인간으로서의 나를 부인해야 한다. 죽어야 할 것은 바로 자연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이다. 그 대신 살아야 할 것은 올바르게 살라고 명령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의지적으로 복종하는 자유의지적 인간으로서의 나다. 

  

하지만 칸트식의 무조건적 명령은 예외적 상황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영화 <프리즈너스>는 두 명의 어린 소녀가 납치되면서 시작된다. 경찰 수사가 착수되고 한 용의자가 체포되지만 구체적인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자 그냥 풀려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피해 소녀의 아빠는 경찰에 격렬히 항의한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딸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고 판단한 아빠는 풀려난 용의자를 납치하여 감금한다. 그리고 폭행과 고문을 가하며 딸의 소재에 대해 추궁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피해 소녀의 부모는 처음엔 어떤 경우라도 폭력은 안 된다고 펄쩍 뛰며 반대한다. 하지만 딸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결국 묵시적으로 동의를 하고 만다. 칸트의 의무론을 준수할 때 발생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이다.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서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딸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용의자를 고문해야만 한다. 하지만 칸트의 정언명령을 엄격히 지킬 때 결코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도 이와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다.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조커의 위치를 찾기 위해 삼천만 시민의 휴대폰을 불법적으로 감청한다. 의무론자 배트맨조차도 예외적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칸트의 의무론에서 비롯된 도덕적 딜레마는 결과론적 도덕 원칙을 취하면 쉽게 해소될 수 있다. 결과론은 도덕적 행위의 특성이 그 행위의 결과가 산출하는 행복의 양에 있다고 본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최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는 도덕적 행위이다. 소녀의 목숨을 구하려는 아빠의 고문행위나 무고한 시민들을 보호하려는 배트맨의 감청행위 모두 결과론적으로는 도덕적이다. 결과론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 자체가 심리적 쾌락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주장처럼 인간은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는 존재다. 최대의 쾌락과 최소의 고통을 위해 애쓰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 본성을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결과론적 도덕 원칙이 된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쾌락의 총량을 최대로, 고통을 최소로 만드는 일이 선이고 도덕이다. 

  

벤담은 쾌락의 양을 객관적으로 계산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계산법까지 제시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계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일이 도덕적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장차 사회에 미칠 영향을 모두 고려해야 된다. 만약 내가 목숨을 살려 준 사람이 나중에 연쇄살인범이 된다면 어떤가? 사람을 살린 일이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사회 전체적으로 고통의 양을 증가시킨 꼴이 되고 만다. 목적론적 도덕관은 종종 비도덕적 수단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기도 한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대의라는 명분 아래에 국가폭력이 자행된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영화 <변호인>에 공안 책임자로 등장하는 차경감은 국가권력이 유지되기 위해서라면 약간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붙잡아다가 온갖 고문으로 거짓자백을 받아내면서도 모든 게 국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믿는다. 

  

의무론과 마찬가지로 결과론 역시 우리를 도덕적 딜레마에서 구해주지 못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취했던 전략은 배트맨을 이러한 도덕적 딜레마에 빠뜨려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조커는 고담시에서 범죄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하비 검사와 배트맨이 사랑하는 여인 레이철을 동시에 납치한다. 그러고는 시한폭탄이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배트맨에게 둘 중 누구의 목숨을 구할 건지 묻는다. 누구를 구하고 누구를 포기해야 더 도덕적일 수 있을까?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되는 행복의 총량은 도대체 어떻게 계산한단 말인가?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하다 - 영화 <다크 나이트>

  

이제 조커는 도덕 실험의 대상을 일반시민에게로까지 확대한다. 도시를 폭파시키겠다는 협박으로 시민들과 죄수들은 각각 다른 배에 나눠 태운 뒤 강 위에 띄운다. 조커는 기내방송으로 두 배에는 각각 폭탄이 실려 있으며 먼저 기폭장치를 눌러 상대편 배를 폭발시키는 쪽은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조커의 말에 사람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인다. 내가 살기 위해선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살고자 하는 욕구와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말라는 준엄한 내면의 목소리가 치열하게 대결을 벌인다. 죽음의 공포가 극에 달할 즈음 시민들은 조심스럽게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하기 시작한다. 무고한 시민의 생명이 범죄자들의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결과론적 도덕 원칙이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기폭장치의 버튼을 누르지는 못한다. 막상 생명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어쩌면 생명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 신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닐까?



참을 수 없는 도덕의 가벼움


대부분의 범죄학 이론들은 ‘왜 인간이 범죄를 저지를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범죄학자 트레비스 허쉬(Travis Hirschi)는 질문을 ‘왜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타고난 악한 본성으로 인해 인간은 그냥 가만히 놔두면 자연스럽게 나쁜 짓을 하게 되는 존재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관습과 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살아간다. 칸트의 생각처럼 물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어떤 힘이 우리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만드는 걸까? 

  

허쉬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사회적 존재로서 개인이 사회와 맺고 있는 유대관계에서 찾았다. 타인들과 긴밀한 애착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함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한 조사에서 청소년들에게 만약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되었다고 상상할 때 무엇이 가장 신경 쓰이는지 물어봤다. 형사처벌이 가장 신경 쓰인다고  응답한 청소년이 10%에 불과한데 반해 가족 또는 이성친구라고 대답한 청소년은 55%에 달했다. 

  

또한 허쉬는 구체적인 장래 계획과 목표가 있는 사람일수록 범죄를 멀리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적인 성공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그만큼 사회의 가치체계에 동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범죄는 그동안 성공을 위해 투자한 모든 노력을 일거에 날려버릴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꺼리게 된다.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와 규범을 인정하는 사람일수록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규칙은 옳으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신념은 범죄행위로 나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된다.

  

허쉬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유대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할 때 범죄행위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에일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부모는 이미 이혼했고 아버지는 성범죄로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였다. 불과 네 살에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외조부모에게 맡겨진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외할아버지는 워노스에게 학대를 일삼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학교, 친구,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외면을 당하자 그녀는 범죄자의 길로 서서히 들어서게 되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진 거라고는 범죄경력 밖에 없는 그녀에게 미래에 대한 목표가 있을 리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보편적 가치나 도덕이 그저 허울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서로 죽이고 빼앗는 위선적인 세상일 뿐이었다. 그녀가 세상과 의미 있는 유대관계란 맺는데 실패했다. 사회관계 속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마치 바람에 날리는 겨처럼 본성의 요구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는 인생과 같았던 것이다.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사회도덕과 관습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운다. 타인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관습화 된 인간’, ‘규범화된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행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도덕과 관습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거나, 적어도 굴레부터 느슨하게 풀린 상태에 돌입해야 한다. 이때 동원되는 심리기제가 ‘자기 합리화’이다. 범죄학자 하워드 베커(Howard S. Becker)는 대마초를 처음으로 피워보려는 대학생들의 마음속에 우선적으로 대마초 흡연에 대한 비도덕적인 인식을 극복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과정에서 동원되는 합리화 논리가 ‘아무도 피해 보는 사람은 없잖아’, ‘그냥 재미 좀 보는 것에 불과해’, ‘일단 한번 해보고 싫으면 그만 두면 되지 뭐’ 등과 같은 생각들이다. 

  

이와 비슷하게 범죄학자 그레샴 사이크스(Gresham Sykes)와 데이비드 맛짜(David Matza)도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내면적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 범죄행위로 진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정을 다섯 가지의 중화 기술이 동원된다고 설명했다. 첫째 방법은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쁜 짓인 건 알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태도를 말한다. 주변 친구들의 압력,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비행에 가담하게 될 때 작동되는 심리다. 둘째, 행위로 인해 초래된 실질적인 피해는 없다는 논리다. 물건을 훔칠 상점이 보험에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보험금을 타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나 대형마트에서 물건 한두 개 없어지는 걸 피해로 볼 수 없다는 식의 생각이다. 


세 번째로 자신의 범행 대상자를 피해자라고 여기지 않는 방법이다. 불법적으로 거액의 재산을 불린 기업주의 돈을 횡령하는 사원의 내면에 이런 식의 정당화 논리가 작동할 수 있다. 넷째,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해 비난할 사람들을 선제적으로 비난하는 방식으로 방어막을 칠 수 있다. ‘국회의원, 판검사들이 더 썩었지’,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세상엔 더 나쁜 사람들이 많아’ 등의 논리가 동원된다. 마지막으로, 범죄행위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끌어들여 범죄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민간인 사찰, 사법살인, 고문을 자행했던 범죄자들도 어쩌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는 대의명분을 동원해 마음속 일말의 도덕심을 무장 해제시켰을지 모른다.

  

애써 중화 기술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어떤 특정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도덕성이 보잘것없을 정도로 그 힘을 잃어버리고 말 때가 있다. 독일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유태인 대학살을 주도했던 나치 친위대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이 어떤 정신병을 앓은 것도,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있었던 것도, 심지어 유태인을 증오했던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 한나 아렌트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도 잔인한 범죄로 기록될 홀로코스트의 집행자가 악마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아렌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아이히만을 유태인 학살자로 몰고 간 전체주의 체제에서 찾았다. 아이히만은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가 비난을 받아야 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 없는 맹목성’이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 중지, 즉 ‘도덕적 모라토리엄’이 그에게서 발견되는 결정적 결함이다. 그런데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바로 이런 조건 속에서 잉태된다. 누구든지 나치 정권처럼 특수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되면 내면의 도덕적 제어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되고, 그 결과 평소에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악하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하여금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만드는 상황의 힘을 다음과 같이 비탈길에 놓인 자동차에 비유해 설명한다.


도덕성이 마치 기어 변환 장치와 같아서 어떤 경우에 중립에 놓인다고 상상해보자. 그와 같은 상황에서 도덕성 이탈이 일어난다. 자동차가 비탈길에 있는 경우 기어를 중립에 놓으면 차와 운전자는 모두 비탈 아래로 미끄러지듯 내려간다. 이런 경우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 것은 운전자의 의도나 솜씨가 아니라 상황의 특성이다.

- 필립 짐바르도

  

중립에 놓인 기어는 옳고 그름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선과 악이 뒤섞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기어를 중립에 놓은 차를 비탈길에 세우면 내연기관의 작동 없이도 저절로 아래로 굴러 내려간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성격이나 기질 같은 심리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더라도 도덕적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상황에 놓이면 저절로 악한 행동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은 인간 도덕성이 상황에 의해 어떻게 지배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1961년 예일 대학교 교수 밀그램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교사와 학생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교사 역을 맡은 피험자에게 건너 방에 있는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만약 학생이 틀리면 벌로 버튼을 눌러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했다. 사실 학생들은 사전에 뽑아 놓은 배우였고 전기충격기도 가짜였지만 교사 역을 맡은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다. 전기충격기의 300 볼트 버튼에는 위험하다는 경고표시가 있었다. 건너 방 학생들은 자꾸 문제를 틀렸고(물론 일부러), 그때마다 피험자들은 마지못해 버튼을 눌러야 했다. 150 볼트 이상의 고전압 버튼을 누를 때마다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물론 연기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무려 피험자의 65%가 450 볼트 전기 버튼을 눌렀다! 처음에는 고전압 버튼 앞에서 주저하던 교사들도 진행자가 실험을 계속하라고 거듭 촉구하자 결국에는 대부분 지시에 따랐다. 학생 연기자들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제발 그만 멈춰달라고 간청을 했고 나중에는 죽은 체 연기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버튼을 누르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인 교사들의 도덕성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교사들에 대한 강압도 없었고 지시를 거부한다고 해서 불이익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참여를 거부하고 실험실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바로 권위에 대한 복종을 부추기는 상황 그 자체였다. 


밀그램의 분석에 따르면 피험자들은 일종의 권위 체계 속에 놓이게 되면서 자신을 권위자들의 목적을 실현해 줄 도구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자율성을 지닌 도덕적 주체라는 인식이 점차 옅어지고 그 대신 권위자의 요구에 순응하려는 심리가 강화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설령 권위자가 비도덕적이거나 불법적인 요구를 하더라도 상대방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여 괜스레 긴장상태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권위자에게 전가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덕적 부담감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 진입한다. 이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이상 비탈길을 따라 굴러내려 가는 일은 시간문제다.




참고문헌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백종현 옮김(아카넷, 2019)

제레미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칙에 대한 서론」, 강준호 옮김(아카넷, 2013)

제임스 피저 & 루이스 포이만, 「윤리학: 옳고 그름의 발견」, 박찬구 외 옮김(울력, 2010)

필립 짐바르도, 「루시퍼 이펙트: 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 임지원·이충호 옮김(웅진지식하우스. 2007)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김선욱 옮김(한길사, 2006)

Franklin E. Zimring & Gordon J. Hawkins, Deterrence: The Legal Threat in Crime Control(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3)

Gresham M. Sykes & David Matza, “Techniques of Neutralization: A Theory of Delinquenc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Vol. 22, No. 6(1957)

Howard S. Becker, “Becoming a Marihuana User,” The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59, No. 3(1953)

Travis Hirschi, Causes of Delinquency(Transaction Publishing,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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