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델마와 루이스>
저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그런데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 벽을 돌면 출구가 나올 것 같은데 다시 벽이고. 다른 길로 가도 다시 벽이고.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 화가 나기도 하고요.
- 김지영의 독백,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 델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한 전업주부이다. 권위적인 남편에게 꼼짝없이 붙들려 순종을 강요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친구 루이스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미혼여성으로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계획 중이다. 어느 날 델마와 루이스는 여행을 나서게 되는데 도중에 잠시 들른 술집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한다. 그곳에서 만난 한 남성이 술에 취한 델마를 성폭행하려 하고 이를 목격한 루이스가 그에게 총을 겨눈다. 욕심을 채우지 못해 화가 난 그 남자는 그녀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자 분노한 루이스가 총을 쏴 그를 죽여 버린다. 두 여성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멕시코를 향해 도주하는데 영화는 그 여정 가운데에 그녀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델마는 우연히 만난 젊고 잘생긴 히치하이커와 하룻밤을 같이 보낸 후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도둑맞는다. 도주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편의점을 털고 단속 경찰관을 총으로 위협해 순찰차 트렁크에 감금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마침내 그녀들의 도주극은 경찰에게 포위된 채 막을 내린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속했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절벽을 향해 힘차게 차를 몬다.
델마와 루이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한마디로 말해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때로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때로는 성차별적 문화를 통해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세상이다. 저속한 말로 희롱하기도 하고 완력을 동원해 여성을 억누르기도 한다. 델마의 남편은 대놓고 아내를 무시하고 사사건건 그녀를 통제하려 한다. 루이스의 남자 친구도 겉보기에는 그녀를 이해해 주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랑이라는 굴레로 여자를 구속하려는 남자일 뿐이다. 트레일러 기사는 처음 본 그녀들을 향해 다짜고짜 혀를 날름거리며 음란한 말을 지껄인다. 델마를 성폭행하려던 남성은 ‘그냥 재미 좀 보려 한 것뿐’이라며 둘러댄다. 남성이 군림하는 세상 속 사법기관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성폭행하려던 남성이 총에 맞아 죽자 델마는 경찰에 신고하려 하지만 루이스는 반대한다. 델마가 술을 마셨고 그 남성과 춤췄기 때문에 성폭행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늦은 밤 술집에서 술에 취해 처음 본 남성과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여성은 성폭행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세상이다.
페미니스트 범죄학자들은 전통적 범죄학 속에 여성의 경험과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기존의 범죄학은 지나치게 남성적 시각에 물들어 있고 남성들의 경험에 편중되어 있는, 한 마디로 남성의 범죄행위를 설명하기에 최적화된 반쪽짜리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페미니스트 범죄학자들은 이른바 주류 범죄학이 성차별적인 사회구조, 문화, 사회제도가 어떻게 범죄현상과 관계하는지의 문제를 외면해 왔다고 지적한다. 세상이 젠더 중립적이라고 가정하고 그러한 틀 안에서 범죄를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과 남성의 범죄성 차이를 기껏해야 타고난 기질이나 신체적 특성 차이로 설명하려 했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범죄학은 기존 범죄학의 성편 향성을 극복하고 성차별적 사회 환경 속에서 가해자 또는 피해자로서 여성들의 경험에 주목하려는 범죄학 패러다임이다.
가부장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사회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부장제가 남성 지배구조의 근간을 이룬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남성은 지배적 위치를, 여성은 종속적 위치를 차지한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후자에 비해 전자에게 상위의 가치가 부여된다. 남성의 상대적 우월성이 강조될수록 여성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불완전한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전통적 사회의 여성은 자율적이거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의된다. 한 남성의 아내나 딸로서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출산 후에는 아이의 엄마로 불린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이와 같은 여성의 존재방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인간은 남성이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 자체로서가 아니라 자기와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한다. 그들은 여자를 자율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여자는 우발적인 존재이다. 여자는 본질적인 것에 대하여 비본질적인 것이다. 남자는 ‘주체’이고, ‘절대’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자’(他者)이다.
- 시몬느 드 보부아르
남성우월주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여성은 고유한 주체성을 상실한 채 언제까지나 타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남성은 지배자로서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데 반해 여성은 남성이 요구하는 존재방식을 받아들인 대가로 그녀에게 주어진 작은 자유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만약 여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요구되는 역할로부터 이탈하고 싶으면 그나마 누리던 조그만 자유마저도 상실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영화 <스토닝>은 이란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소라야의 남편 알리는 20년이나 함께 산 아내를 버리고 나이 어린 소녀와 재혼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세 자녀를 혼자서 부양할 능력이 없는 소라야는 남편의 거듭된 이혼 요구를 거부한다. 그러자 알리는 아내가 자기 친구와 간통을 저질렀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친구를 협박해 거짓으로 증언하게 만든다. 마을회의가 열리고 율법에 따라 그녀에게 투석형이 선고된다. 소라야의 하반신이 땅에 묻히고 그녀의 아버지, 두 아들, 남편, 그리고 마을 남자들이 그녀에게 차례차례 돌을 던진다. 얼굴에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가면서 소라야는 둘러선 남자들을 향해 울부짖는다. “난 당신들의 친구, 이웃, 엄마, 딸, 아내예요.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죠?”
소라야의 아버지는 딸에게 돌을 던지기 전 사람들에게 ‘저 아이는 내 딸이 아니다’라고 외친다. 그동안 소라야는 남성들이 정의하는 방식대로 존재했었다. 그녀의 존재방식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라야로부터 존재의 의미를 도로 거두어 가는 것도 전적으로 남성들의 결정에 달려있다. 이제 남성들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방식으로 일시적으로 그녀에게 귀속되었던 존재의 의미를 회수해간다. 남성들의 돌에 맞은 소라야는 더 이상 친구도, 이웃도, 엄마도, 딸도, 아내도 아니다. 존재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되어버린 것이다.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은 바로 출산이다. 여성은 출산을 통해 남성 중심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계승해야 할 의무를 진다. 가부장제 뿌리가 깊은 사회일수록 아들을 출산해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여성의 존재가치로 여겨진다. 영화 <블라인드 마운틴>은 여성을 한낱 출산 도구로 밖에 여기지 않는 가부장제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쉐에메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던 중 인신매매업자에게 속아서 중국의 한 산골마을에 팔려간다. 늙은 농부의 집에 감금된 채 강제로 성관계를 당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거듭된 탈출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던 중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에게 연락이 닿는다. 아버지가 공안을 데리고 마을로 찾아오지만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과 저지에 부딪혀 탈출이 좌절되고 만다.
영화 속 범죄자는 쉐에메이를 성폭행한 농부와 인신매매업자만이 아니다. 사실 마을 전체가 공범이나 다름없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들이 가부장제의 전통을 수호하는데 공조한다. 마을에는 쉐에메이 말고도 비슷하게 끌러온 여성들이 여러 명 살고 있다. 마을 남자들은 이 여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상호 감시하고, 탈출 한 여성들을 되찾아오는데 힘을 합친다. 마을 이장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범죄를 묵인하고 법집행기관인 공안조차 수수방관한다. 같은 피해자인 여성들 역시 무력하기 짝이 없다. 강제로 아기를 출산한 뒤 모든 걸 체념한 채 살아간다. 늙은 농부의 어머니는 같은 여성으로서 쉐에메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을 잠시 보이지만 놀랍게도 아들이 그녀를 성폭행할 때에 옆에서 거든다. 가문의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불사하려는 듯하다. 어느 날 마을 연못에 버려진 여아의 사체가 발견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일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가부장제를 이어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들이지 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사회는 평등이라는 인권적 가치와 함께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적 가부장제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는 무엇보다도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분리하는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18세기 유럽 사회에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이 등장하던 당시에 주된 관심은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있었다. 절대왕권으로부터 개인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따라서 가부장제 지배하의 여성인권을 지키려는 시도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국가의 권력이 지배하는 정치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지배하는 가정을 사적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그러고선 인권을 둘러싼 모든 논의를 공적 영역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은 성차별을 옹호하는 가부장제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개인, 인간의 위치로 승격시키는 것과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유용한 전략이었다. ‘여성적 공간’이라고 간주되는 사적인 영역에서는 인권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 정희진
공·사 영역 분리 이데올로기는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억압과 폭력에 있어 국가와 사회의 원칙적 불간섭주의를 정당화했다. 프라이버시 존중이라는 명목 하에 국가는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이 때문에 과거에는 가정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명백한 폭력사건에 해당해도 가정 내 문제로 보고 입건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명목상으로는 가정 내 프라이버시 보호지만 실질적인 수혜자는 가장인 남성들뿐이었다. 가부장제 하에서 대부분의 가정폭력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원칙적 불간섭주의로 인해 가정은 오랫동안 인권의 사각지대로 남겨졌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누릴 권리를 거부당했고 고통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 영화 <블라인드 마운틴>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잘 드러나 있다. 한 번은 쉐에메이가 간신히 마을을 탈출하여 읍내의 시외버스정류장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한다. 시외버스에 탑승하고 출발을 기다리던 중 남편과 마을 남자들이 들이닥쳐 그녀를 강제로 끌어내리려 한다. 쉐에메이가 승객들에게 도와달라면 울부짖자 남편은 집안일이니까 나서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한다. 이번엔 남자들이 강제로 쉐에메이를 트럭에 실으려 할 때 지나가던 경찰관이 이를 목격한다. 하지만 아내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남편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그냥 지나쳐간다.
오늘날까지 성차별적 가부장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남성의 재산 소유와 경제적 생산수단의 통제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 형성기에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생산의 중심이 가정에서 공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남성은 임금노동자로서 가족 구성원의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되었고 여성은 가사노동을 전담하게 되었다. 성에 따른 노동의 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노동의 대가로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지급받지만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여성은 무임금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여성의 노동은 남성에 비해 평가절하 되었고 유휴노동력이나 대체 노동력 정도로 취급되었다. 설령 여성이 취직을 해서 임금노동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남성의 업무를 옆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가정 내에서 아내가 남편의 내조자 역할을 하듯이 직장 내에서도 여성의 역할은 남성의 업무를 돕는데 만족해야 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이 때리는 남편과 결별하지 못하고 폭력을 감수하면서까지 결혼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경제적인 문제가 결정적이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녀 부양의 책임을 맡아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영화 <더 스토닝>에서 소라야가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이혼하지 못한 이유도 이혼 후 자녀를 부양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이 경제권을 독점하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남성에게 양도하고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만약 이혼을 한다면 그녀를 받아 줄 또 다른 남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영화 <노스 컨츄리>는 여성 광부들이 법정투쟁으로 직장 내 성희롱 금지 정책을 이끌어냈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조시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을 찾아온다. 그리고 생계비를 벌기 위해 인근 광산의 인부로 취직한다. 이에 보수적인 아버지는 딸이 ‘여성답게’ 살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하지만 조시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렌다. 그런데 광산 작업장의 현실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수인 여성 광부들을 향한 남성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이 난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 조시는 그곳에서 학창 시절 한때 남자 친구였던 바비를 만나는데 그는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한다. 자신과 동료 여성 광부들에 대한 성적 모욕과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조시는 회사 사장을 직접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장으로부터 돌아온 답변은 괜히 여직원들 선동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충고였다. 다음날 출근한 조시는 여자 화장실 벽면에 인분으로 휘갈겨놓은 ‘나쁜 년’, ‘밀고자’ 등 욕설을 보게 된다. 그날 작업 중 조시가 바비로부터 폭행을 당하지만 모든 광부들이 외면한다. 이제 조시는 퇴사를 하고 회사를 상대로 성희롱 집단소송을 준비한다.
성폭력은 전통사회 속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기 위해 동원했던 방법 중 하나이다. 남성의 우월적 지위에 도전하는 여성을 ‘길들이기’ 위해 성폭력이 사용되곤 하였다. 남태평양 애드미럴티 제도의 마누스 섬에 사는 부족의 남편들도 아내를 길들이기 위해 이러한 방법에 의존했다. 지나치게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는 아내를 숲 속에 데려다가 친구들을 시켜 성폭행하는 관습이 있었다. 성폭력은 순응적이지 않은 여성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원래 자신의 위치로 되돌려 보내는 방법 중 하나였다.
남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영역일수록 소수인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더욱 노골적이고 빈번했다. 20세기 초 러시아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은 작업을 마친 뒤에는 남성 감독자로부터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훔친 물건을 확인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여성 노동자들의 몸을 만지고 젖가슴을 드러내며 남성 노동자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낄낄대고 즐겼다. 이렇게 여성노동자들을 모욕하고 비하하는 목적은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지키고 여성의 도전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었다.
영화 <노스 컨츄리>에서 남성 노동자들이 온갖 추잡한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이면에도 같은 목적이 있다. 오랜 기간 남성들의 전유물이자 성역으로 여겨져 오던 광산 노동에 여성들이 진출하게 되자 남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침해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남성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다름없었기에 여성들의 무모한 도전을 단호한 응징으로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헤게모니를 사수하기 위해 남성들이 선택한 공격 지점은 바로 여성의 몸이었다. 여성의 몸을 하나의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켜 놀림거리로 만들어 버렸다. 남성들의 시선이 여성의 몸을 일개 사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남성들의 성적 시선이 여성의 몸에 닿으면 여성은 자신의 몸에 대한 주체성을 상실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 여성노동자들은 대등한 동료로서의 지위에서 성애화한 육체로 강등된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행위 자체를 문제 삼는다. 권력적 속성이 이미 성행위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부장제 환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는 대등한 주체 간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성관계를 매개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일종의 성계급(sex class)이 만들어진다.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종속이라는 계급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남성은 여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남성다워진다.’ 남성다워짐은 여성의 몸을 정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지위 격상’이다. 반면 성관계에 참여한 여성은 ‘남성을 위한 몸’으로 지위가 강등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에게 성행위는 단순히 성욕 충족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성행위는 대상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소유하는 행위이다.
남자가 성행위에서 구하는 것은 주관적인 덧없는 쾌락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정복하고 붙잡고 소유하기를 원한다. 여자를 갖는다는 것은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다. 보습이 밭고랑 속에 파고들 듯, 남자는 여자 속에 파고든다. 남자는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를 자기의 소유로 하듯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단 한 번도 누군가에 의해 소유된 적이 없는 땅을 처녀지라고 부른다. 처녀는 아직까지 정복되지 않는 여성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의해 정복되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성관계는 남성들이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행하는 정복 행위이다. 누군가를 내 소유로 만든다는 것은 상대방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대상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자의적 처분권을 향유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행위는 일종의 권력 행위나 마찬가지다.
영화 <블라인드 마운틴>에서 쉐에메이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농부는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데 번번이 실패한다. 근심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그에게 마을 남자들이 충고를 한다. “여자란 일단 자빠뜨리면 끝나는 거야!” 강제로라도 일단 성관계를 맺고 나면 그녀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날 밤 농부는 주변의 충고대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쉐에메이를 강간하는 데 성공한다. 잠시 후 만족한 얼굴로 집안에 들어서는 농부와 그러한 아들을 흐뭇한 미소로 맞이하는 아버지. 둘 사이에 조용히 술과 담배가 오간다. 승리의 축배를 들이켠다.
전통적으로 남편은 결혼을 통해 아내의 몸에 대한 전적인 지배권을 갖는다고 여겨졌다. 여기에는 당연히 배우자의 성관계 요구에 대한 응대 의무가 포함된다. 고대시대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한 아내는 처벌로 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해야 했다. 오늘날에 와서도 결혼은 배우자와의 성관계에 대한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부부 강간’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모순어법 정도로 취급되었다. 그러다가 1978년 미국 뉴욕 주에서 처음으로 부부 강간을 금지하는 법이 통과되면서 부부 사이의 강제적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래부터 형법적으로는 부부 사이 강간이 성립되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부부 강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2013년 남편이 성관계를 거부하는 아내를 폭행한 뒤 옷을 찢고 강제로 성관계한 사건에 대하여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헌법이 보장하는 혼인과 가족생활의 내용, 가정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변화, 형법의 체계와 개정 결과 등을 보면 실질적인 혼인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도 남편이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가해 아내를 간음한 경우에는 강간죄가 성립된다.
- 대법원 판결문, 2013년
이와 같은 판결은 불과 4년 전 비슷한 사건에서 보여줬던 대법원의 입장으로부터 상당히 진전된 내용이다. 2009년 이혼하기로 합의한 상태에서 남편이 찾아와 아내에게 칼을 들이대며 강제로 성관계를 맺은 사건에서 대법원은 강간죄를 인정했다. 다만 당사자 사이의 혼인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 났고 이혼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도 강간죄의 객체가 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쉽게 말해 둘은 사실상 부부가 아닌 남남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강간죄가 성립된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면 혼인관계가 파탄 나지도, 이혼에 대해 합의하지도 않았다면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다고 보고 강간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인 것이다.
결국 우리나라 법원이 최근까지도 부부 강간의 성립을 부정한 이유는 아내의 몸에 대한 남편의 실질적 지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 지배의 형태가 강압에 의한 성행위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성폭력은 그 대상의 배우자 유무를 떠나 본질에 있어서는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성폭력은 대상에 대한 지배 욕구의 극단적 표현방식일 뿐이다. 상대 여성을 자신 앞에 굴복시켜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 유지, 회복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모든 유형의 성폭력은 별로 다르지 않다. 어떤 강간범은 왜 강간을 저질렀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내가 왜 여자를 강간하느냐고요? 나는 본질적으로 남자로서 맹수인 셈이고, 남자에게 모든 여자는 사냥감이니까요. 여자를 덮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붙잡아놓았을 때, 그 여자의 얼굴 표정이 눈에 선합니다. 내가 승리해서 여자를 차지했다는 기분이 들지요.
성욕을 해소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유혹은 승리의 쾌감 일지 모른다. 맹수를 만난 사냥감처럼 눈앞의 폭력에 공포에 질린 여성을 바라보면서 범죄자는 자신에게 내재된 힘을 새삼 체험한다. 자신의 성기를 노출해서 여성들을 놀래 주는 ‘바바리맨’도, 음담패설로 여성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성희롱범도 같은 것을 원한다. 영화 ‘노스 컨츄리’에서 남자 광부들은 여자 동료의 도시락 속에 몰래 남자 성기 모형을 넣어둔다. 나중에 여자 광부들이 도시락을 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며 남자 광부들은 낄낄대는 좋아한다. 이들이 원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여성을 자신의 통제력 아래 두고 싶어 하는 남성들의 지배욕은 언제나 그랬듯이 여성의 몸을 향해 작동하기 마련이다.
영화 <피고인>은 1983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실제로 발생한 집단강간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사라는 애인과 다툰 뒤 기분전환을 위해 친구가 일하는 변두리 술집에 놀러 간다. 그리고 술집 안에서 세 명의 남성들로부터 번갈아 강간을 당한다. 그때 술집에 있던 다른 남성들은 말리기는커녕 마치 운동경기를 관람하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담당 검사는 사건 당시 사라가 술에 취해있었고 야한 옷차림에 선정적인 춤을 추었으며 대마초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법정에서 불리할 거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피의자들의 변호사 측과 협상하여 강간죄 대신 9개월 실형에 불과한 과실치상죄로 기소하고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러한 처분에 대해 사라는 크게 분노하며 반발한다. 검사는 차츰 사라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강간죄 입증을 위한 증언 확보에 나선다.
사건이 법정으로 가자 사라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이 도마 위에 오른다. 그녀의 음주습관, 대마초 흡연, 그리고 마약 판매상인 남자 친구와의 동거 전력이 공개되고 이 때문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을 받는다. 사실 사라는 피해 직후 병원에서 몸속에 남은 증거를 채취했기 때문에 성관계 자체를 입증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결국 쟁점은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강간 피해에 대한 책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거였다. 그리고 책임의 근거는 그녀의 사생활과 과거 전력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그녀는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성폭행 피해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었다. 한 마디로 ‘행실이 좋지 못한 여성’에 속했다. 피해자가 ‘정숙한 여성’의 전형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그 지점에서 ‘강간 신화’가 시작된다. 어쩌면 그녀가 일부러 강간을 유발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녀의 내면에는 강간을 당하고 싶은 환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죽을힘을 다해 저항하면 당하지 않을 텐데. 처음엔 억지로 시작되었더라도 끝까지 반항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정형화된 성폭행 피해자를 둘러싼 편견과 선입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과거부터 ‘정숙한 여성 대 문란한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이 있었고 후자에 속한 여성에 대해서는 가급적 성폭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예를 들어, 14세기 프랑스 파리에서는 법원 결정으로 성매매 여성은 아예 성폭행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강간범들은 처벌을 피하려고 다짜고짜 피해자를 성매매 여성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성이라고 판단되면 피해를 당한 후에도 오히려 가해자로 취급되었다. 원래부터 남성은 무제한적 성욕을 가지고 있는데 문란한 여성이 괜스레 남성을 자극해 성욕을 분출하게 만들었다는 논리였다. 이런 황당한 논리가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오히려 남성을 유혹해 앞길을 망치는 ‘팜므파탈’로 둔갑하는 일이 발생했다.
1990년에 개봉된 영화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몇 년 전 실제로 발생한 강간미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삼십 대의 평범한 가정주부인 임정희는 밤늦게 귀가하다가 두 청년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 그중 한 명이 강제로 키스하려고 입속으로 혀를 들이밀자 그녀는 그자의 혀를 물어뜯고 가까스로 현장을 벗어난다. 그런데 정작 성폭행 피해자인 임정희는 가해자를 다치게 했다고 고소를 당한다. 법원은 그녀의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결국 양측 모두 유죄가 인정되고 그녀는 집행유예로 풀러 나온다. 그런데 세상은 도리어 그녀를 비난한다. 항소심이 시작되자 가해자 측 변호사는 임정희의 과거 전력과 행실을 문제 삼으며 그녀를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붙인다. 그러면서 그녀가 성폭행을 당한 게 아니라 도리어 가해자를 유혹한 거라고 주장한다. 임정희는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묻는다. “이혼을 했고, 술 마셨고, 새벽 1시에 비틀거렸어요. 그러면 강간당해도 되는 건가요?”
범행 당시 저항의 정도는 피해자가 ‘진정한 피해자’인지를 밝히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왔다. 13세기 영국에서는 남자가 성폭행을 하려고 달려들면 여자들은 무조건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만약 여성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성관계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됐다. 15세기 독일의 레겐스브루크 도시법은 더욱 놀랍다. 성폭행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찢어진 옷, 쉰 목소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증거로 제시해야만 했다. 17세기 중국 청나라 형법도 성폭행이 성립되기 위해서 피해자의 저항을 엄격하게 요구했다. 피해자는 성폭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비명을 지르며 저항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중간에 피해자가 반항과 비명을 멈추면 서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진 성교로 간주했다.
피해자가 거의 죽을힘을 다해 저항해야만 성폭행으로 인정하는 태도의 이면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첫째, 여성이 끝까지 저항하면 남성 혼자 힘으로 강간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이미 오래전에 유럽의 의사들과 법학자들은 남성 한 명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성인 여성을 강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놓은 바가 있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에도 청바지 입은 여성에 대한 강간의 성립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청바지는 재질 상 잘 찢어지지 않으며 몸에 달라붙어 강제로 벗기기도 어렵기 때문에 피해자의 협조 없이는 성관계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폭행범 앞에서 피해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공포심과 당혹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공포심에 사로잡힌 피해자들은 종종 몸이 얼어붙어 저항을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저항을 했다가 가해자로부터 보복폭행을 당할까 봐 두려워 저항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둘째, 여성이 강간을 당하는 동안 성적 흥분을 느꼈다면 동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흔히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성관계에 관한 잘못된 환상 중 하나는 여성의 무의식 속에 ‘강한’ 남성에 의해 제압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그릇된 믿음은 겉으로 성관계를 거부하는 여성의 말과 태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막상 강제로라도 성관계를 맺으면 좋아할 것이라는 위험한 발상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강간을 통해 쾌락을 느끼는 여성들도 있는데 이들은 내심 강간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상상력에서 탄생한 신화에 불과하다. 포르노그래피가 전파하는 성기 삽입 중심의 뒤틀린 성관계 묘사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탓에 왜곡되어버린 성애 관념이다. 피해자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도중 성적 만족을 경험한다는 주장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은 극도의 공포감과 수치심이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평생 과거의 치욕스러운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한다.
성폭력 피해자는 버림받은 자, 더럽혀진 자, 심지어는 꼬리 친 자가 아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강제당한 자이며, 살아남은 자(survivor)이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이다. 그가 자기의 피해를 자기의 내면으로 감추지 않고 사회적 문제의 일환으로 문제화할 때, 그는 불의에 맞서 싸우는 자이며 타인의 유사한 피해를 줄여가기 위한 개혁가이기도 하다.
- 한인섭
흔히 성폭력은 유일하게 ‘피해자가 비난받는 범죄’라고 한다. 옷차림과 행실 때문에 비난받고,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고 비난받고, 즉시 신고하지 않았다고 비난받는다. 먼저 ‘꼬리 치지는’ 않았는지, 합의금을 노리는 ‘꽃뱀’은 아닌지 거듭 의심을 당하기도 한다. 모든 의심의 눈초리를 털어내기 위해서는 수사와 재판단계에서 자신이 순도 백 퍼센트 ‘오리지널 강간 피해자’라는 점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피해의 진정성이 입증되더라도 성폭력 피해자에게 들러붙은 오명이 웬만해서는 말끔히 제거되지 않는다. 남성주의 편견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더럽혀진 자’로서 몸과 마음에 남겨진 피해의 자국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한 해에 전 세계적으로 약 5만 명 이상의 여성이 배우자, 남자 친구, 가족 구성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다. 하루 평균 대략 137명의 여성이 젠더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지금까지 적어도 2억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가 관습 하에 성기 절제를 당했다. 또한 6억 5천만 명의 소녀들이 열여덟째 생일을 맞이하기도 전에 강제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천5백만 명의 사춘기 소녀들이 강제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 밖에도 가정, 학교, 직장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여성에 대한 온갖 종류의 폭력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최근 들어서 급증하고 있는 디지털 성폭력은 젠더폭력의 대상과 피해의 정도를 무한대로 확장하고 있다. 여성의 몸은 카메라로 찍히고 컴퓨터로 가공되어 인터넷망을 타고 유통되고 소비된다. 인공지능 기술로 무장한 딥 페이크(deepfake)의 등장으로 가짜와 진짜 사이의 경계뿐만 아니라 성폭력 대상의 한계마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히 전 방위적, 무차별적 공격이라고 할만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을 통해 유포되는 청소년들의 성착취 영상을 보려고 수 만 명의 남성들이 몰려드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영상을 찍도록 강요한 자, 비밀방을 열어 놓고 입장료 받은 자, 영상을 유포한 자, 다운로드한 자, 영상을 본 자까지 모조리 잡아들여 일벌백계를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사이버 성폭력 전담 경찰이 음란물 유통경로를 24시간 두 눈 부릅뜨고 지키는 것도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남성 중심적 사회구조·제도· 문화에 대한 변화가 없으면 제2의 소라넷과 N번방이 출현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프라인이던지 온라인이던지 성폭력을 단순히 과도한 성욕이나 성적 호기심의 문제만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본질은 성을 둘러싼 권력구조와 갈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 성매매, 직장 내 성희롱, 스토킹은 명칭만 다를 뿐 본질에 있어서 별반 차이가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변화의 시작을 남성이 아닌 여성에게서 찾는다. 여자를 타자나 객체로 만들어버리는 남성들의 시도를 과감히 거부하라고 촉구한다. 남성의 눈에 비친 여성으로서의 존재방식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 자신의 주체가 되라고 말한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탈출하여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변화를 이끄는 힘은 여성들 간의 연대 속에 있다. 영화 <노스 컨츄리>에는 폭력 앞에 좌절하고 슬퍼하는 딸을 보며 같은 여성으로서 그 고통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비록 가부장제의 전통 속에서 숨 죽여 살아왔던 엄마지만 아프지 않아서 그랬던 게 아니다. 그저 기존 질서에 순응하면서 꾹꾹 참아왔던 것뿐이다. 영화 속 엄마는 딸의 옆에 서서 가부장적인 남편, 세상의 남성들,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에 함께 맞선다. 조시가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자 처음에 여성 동료들은 비웃거나 외면한다. 기존 질서 체제와 맞설 때 찾아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조시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이고 모든 여성들이 겪는 아픔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점차 여성 동료들도 동참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러한 연대의 힘으로 미국 최초의 성희롱 집단소송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세대와 이념 그리고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남성 우월적 권력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통분모로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고 폄하하는 세상을 향해 한 목소리를 낼 때 젠더폭력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희영 옮김(동서문화사, 2017)
정경자, ‘성폭력 피해현황과 그 대책,’ 피해자학연구, 2권(199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13)
한인섭, ‘성폭력의 법적 문제와 대책,’ 인간발달연구, 3권 1호(1996)
한스 페터 뒤르, 「음란과 폭력: 성을 통해 본 인간 본능의 역사」, 최상안 옮김(한길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