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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샬럿 Jan 01. 2023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까

강릉에서 떠올린 사랑에 대한 단상들

한 겨울마다 나는 혼자 강릉여행을 가곤 한다. 겨울이 되면 도지는 고질병 때문이다. 


겨울만 되면 나는 평소보다 몇 십배는 더 많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회상하기 시작한다. 아마 춥고 매서운 날씨 때문에 혼자 집에서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일 것이다. 혼자 있는 이 시간에 회상하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모두 옛 인연이 되어버린, 내가 그 당시 사랑하던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다. 평소에 떠올릴 여유조차 없던 그들은 갑작스럽게 머릿속을 스쳐가고, 함께 했던 순간과 내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제 멋대로 뒤섞여 자리 잡기 시작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 마음속 한편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다가 떠오르게 되는 기억은 예상외로 힘이 세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때 겪었던 감정의 흐름을 다시 경험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은 때론 벅차기도 하지만 대부분 센티멘탈하다. 가끔 의미 없는 미련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건 끝이 났기에 회상하는 나는 쓸쓸해질 뿐이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도 혼자 강릉에 갔다. 내겐 거의 매년 겨울, 연말 혹은 연초마다 하는 '의식'같은 여행이다. 명목 상으로는 흘러간 해를 둘러보고 새로운 해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다짐하지만, 사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을 덜어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특히 요즘 괴로울 만큼 나를 선명하게 사로잡는 추억들은 주로 강릉이 배경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그 사람과 연이 깊었던 곳을 방문하는 노제(路祭)를 지내 듯, 누군가와의 기억이 강렬하게 묻어 있는 강릉의 장소를 다시 방문하면 날 강력하게 감싸고 있는 추억을 스스로 정리하고 어찌어찌 날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제발 더 이상 이미 지나간 추억이 날 괴롭게 하지 않았으면 했다. 조금만 집중력을 잃으면 계속 과거에 사로잡혀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달라질 수 있었을까'라고 의미 없는 질문을 수없이 되묻는 나의 모습이 싫었다. 그 추억들의 색깔이 조금은 바래지고, 흐려질 수 있도록 이번 혼자 여행으로 덧칠해 버리고 싶었다. 


강릉에 도착한 후엔 온갖 곳을 혼자 돌아다녔다. 누군가와 같이 딸기를 사러 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몇 번이나 돌아갔던 딸기 농장, 누군가와 헤어지기로 한 날 혼자 가서 맥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고 청승을 떨던 브루어리, 누군가와 우연한 기회로 먼저 만날 뻔했었던 책방, 누군가와 같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던 바닷가, 나중에 꼭 같이 와보자고 하고 로비만 방문했다 돌아간 멋진 호텔... 


막상 행복했던 추억이 있던 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 적어도 아련한 그리움과 그땐 그랬지, 하는 감정에 따뜻해지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어김없이 자꾸 심란했다. 추억을 정리하고 날려 보낸다기보단 여전히 끊임없이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땠을까,라는 후회와 괴로움이 날 괴롭혔다. 다시 잘해보려는 미련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보다는, 뭐라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으로 인해 미화된 기억과 그때보다 내가 조금 철이 들었다는 사실이 만들어 내는 미안함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한 사람과 좋은 끝맺음을 만들지 못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와 헤어진 이유에는 수많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을 텐데, 나는 자꾸 모든 비난의 화살을 나에게 돌리고 있었다. 모두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절망스러운 마음에는 마침 다소 평소보다 나약해져 있는 자아의식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가지고 밤에 숙소로 돌아와 노래를 틀었다. 유달리 제목부터 귀에 들어오는 노래가 있었다. 너드커넥션의 '우린 노래가 될까'라는 노래였다. 


오래된 약속들이 한 편의 짧은 시로 남을 때
속삭이던 말들이 몇 개의 아픈 선율이 될 때
서로가 각자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할 때

그때 기억은 노래가 된다


지나간 나의 사랑 이야기도 매 번 노래가 되었다면 좋았었겠다고 생각했다. 마치 앨범의 수록곡들처럼 차곡차곡 어딘가에 담겨 남아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사랑의 시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담긴 멜로디였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노랫말에서는 누군가와 함께 했던 오래된 약속들이 한 편의 짧은 시로 남을 때, 누군가와 속삭이던 말들이 몇 개의 아픈 선율이 될 때, 결국 서로가 각자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할 때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과연 내겐 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었던 사랑의 경험이 있었을까, 그래서 대체 몇 곡이나 노래로 남을 수 있을까라는 자조적인 의문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느꼈듯, 모든 지나간 사랑은 내 머릿속에서 군데군데 찢겼거나 희미해지고, 미화되고 희석되어 후회가 남는 멜로디로 남아 있었다. 이미 자연스럽게 완결된 노래로 남기엔 글러 버린 작품들이었다. 그렇게 불완전한 멜로디들은 상처 속 파편처럼 남아, 작곡가인 나를 계속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불완전한 작품을 만들어 낸 나를 스스로 탓하게 만들었다. 그때 내가 좀 더 잘했다면, 내게 좀 더 능력이 있었다면, 내가 더 너그러웠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랑이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라는 퉁명스러운 의문이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누군가와 함께였던 동해의 깊고 차갑던 밤을 기억한다 해도, 함께 바라보던 떠오르던 태양의 그림자 같던 윤슬을 기억한다 해도, 이 모든 걸 기어이 붙들고 영원히 간직하거나 그 모든 말들과 약속들을 영원히 잊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사랑은 완벽한 멜로디를 가진, 기승전결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며 끝맺음조차 무결한 노래로 남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멜로디로 남길 수 없다면 그냥 치워버리자,라는 소극적 완벽주의자의 극단적인 선택지만이 답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기억을 정리하고, 흘려보내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 동시에 '망각은 축복이다'라는 말도 되뇌었다. 간직하고 있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사랑이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한 채 사라진다면 또 어떤가. 이미 지나간 시간인데 희미해지다 사라지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날 괴롭히는 과거의 기억이 그저 불타버린 재처럼 가볍게 날려 사라진다면 얼마나 쉽고 편리할까.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까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가면
함께 지새운 밤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까

우린 노래가 될 수 있을까
몇 해의 시간이 흘러가면
함께 울었던 날들 모두 추억이라 부를까

반항심 넘치는 상상을 하다 다시 이렇게 생각을 고쳐 먹는다- 모든 노래가 매 번 그 자체로 완벽한 걸작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작곡가 마음에 드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습작을 수도 없이 만들어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공을 보장하는 습작의 수가 딱히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멋진 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뿐만 아니라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습작이 실패했다고 해서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완벽하지 않은, 불안전한 형태여도 상관없다. 무엇인가를 내 방식으로 시도해 보았다는 증거이며, 결국 나 자신이 갖가지 형태의 경험을 쌓았다는 증거가 된다. 더 오랜 시간이 흘러, 습작으로만 남아있던 미완성 멜로디가 내게 불현듯 떠오르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 그 멜로디는 새로운 작품의 영감을 불러일으켜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이 전의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레퍼런스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내 사랑의 기억이 습작으로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간 나 스스로 꼭 간직하고 싶은 노래를 써 내려가는 날이 올 것이다. 시작과 끝이 분명히 있고,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때론 반복되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새로운 마디가 펼쳐지기도 하다가 결국 클라이맥스까지 맞이하는 그런 노래. 어쩌다 불협화음이 나거나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더라도 나중엔 작품의 소중한 한 조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노래. 그 노래는 내 예상보다 짧을 수도 있지만 중요하지 않다, 노래의 길이가 완벽한 이야기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2023년에는 완벽한 노래를 써 내려가야 한다는 두려움에 갇혀 겁먹지 않기를. 기꺼이 새로운 사랑의 멜로디를 써내려 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비록 지금이 쉼표밖에 없는 부분같더라도 다음 마디에 더 복합적인 멜로디를 내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고, 더 긴 호흡을 위한 숨 고르기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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