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스코틀랜드에 서다.
버밍엄에서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두 번째 도시 글래스고(glasgow). "글래스고"라는 참 낭만적인 이름처럼 중세 시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우아한 도시를 상상했었는데 기대만큼 첫인상이 예쁜 곳은 아니었다. 다소 낡고 지저분한 거리와 건물, 소란스러운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의 시끄러운 움직임은 너무 현실적이라 "여행"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현대미술관 (Gallery of Modern Art(GOMA))
가장 눈에 띄었던 건 미술관 앞에 서있던 웰링턴 공(Duke of Wellington)의 기마상이었다. 그런데 좀 흥미로웠다. 웰링턴과 그가 타고 있는 말 머리에 모두 "주차 고깔"이 씌어 있었기 때문. 위엄 있는 공작의 머리 위에 귀엽게 올려진 주차 고깔에는 우스갯소리처럼 킥킥댈 수 있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비둘기의 배설물로부터 동상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에서부터 몰래 씌우고 벗기는 행위로 실랑이하던 시민과 정부의 줄다리기까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유쾌한 그런 농담 같은 이야기. 들리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처음 시작은 술이 거하게 올랐거나 객기 어린 누군가의 패기로 시작된 단순한 "장난"이었던 것 같다. 그 장난이 사람들의 호응과 애착을 샀고, 어느새 감각적인 유머와 센스가 돋보이는 독창적인 예술로 둔갑하여 지금은 빼놓을 수 없는 글래스고의 명물이 되었다.
#조지스퀘어(George Square)
유럽에 있는 많은 도시가 그렇듯 글래스고에도 시청을 중심으로 널찍한 광장이 조성되어 있었다. 시청 앞에는 월터 스콧(Walter Scott) 동상이 우뚝 서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제임스 와트, 빅토리아 여왕 등 여러 유명 인사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스코틀랜드가 사랑한 역사소설가 월터 스콧의 기념탑이 에든버러에서도 인상적이었는데, 글래스고 메인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존경심이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글래스고대성당
올드타운에 위치한 글래스고 대성당. 시끄러운 중심가를 벗어나 이곳에 들어서니 다행히도 참 한가했다. 코로나 때문에 달라진 여행 모습이라면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의 실내 관람을 할 수 없다는 점,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단출해진 일정이 우리를 산책인, 또는 산악인으로 이끌었다는 점인데, 글래스고에서 찾은 조용하고 운치 있는 올드타운은 우리만의 편안한 산책로로 제격이었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 대성당뿐만 아니라 계획에 없던 네크로폴리스와 윌리엄월리스 기념비까지..! 올드타운에서 우연히 마주한 산책 겸 여행의 요소요소들은 다소 좋지 않았던 글래스고의 첫인상을 달래주었다.
#네크로폴리스(Nekropolis)
그리스어로 "죽은 자의 도시"를 뜻한다는 네크로폴리스. 성당 뒤편에 자리 잡은 "Glasgow Necropolis"에는 그 지역의 역대 지도자와 유명 인사들의 묘지가 화려하게 조성되어 있다. 공동묘지를 두고 "화려함"이라는 단어가 제대로 된 표현인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지만, 언덕 한가득 다양한 디자인의 모양으로 촘촘하게 박힌 비석들은 그 자체로 꽤 멋진 공간을 표현한다. 유럽의 무덤은 한국인이 느끼는 만큼 오싹하거나 혐오스러운 장소가 아니다. 죽어서도 하나님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유럽의 교회나 성당 근처에는 공동묘지가 제법 흔한 데다가, 묘지보다는 차라리 공원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개방적이고 편안한 느낌이다.
묘비명에 "윌리엄"이라는 이름이 너무 많아서 한때 글래스고에 "윌리엄가"가 기세를 펼쳤나 보다 했다가, 바보야, 그런데 윌리엄이 성이 아니라 이름이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라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글래스고 시내가 내다보이는 언덕 꼭대기까지 올랐다. 수많은 비석과 탁 트이는 조망, 그리고 비석에 기대어 지긋이 눈을 감고 마음을 추스르던 어떤 이름 모를 동양인의 외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앤 롤링"이 교회 옆에 있는 공동묘지에 자주 놀러 가 묘비에 적힌 글을 읽으며 공상에 빠지거나 상상력을 얻으며 해리포터 등장인물들을 생각해냈다고 하는데, 이곳을 산책하다 보니 유럽의 묘지는 누군가에게 충분히 영감과 위로를 줄만한 공간이었다.
#브레이브하트와 윌리엄월리스
스코틀랜드 여행을 앞두고 남편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브레이브하트"를 보았다. 전체관람가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잔인한 장면이 넘쳐나서 종종 꼬맹이의 눈을 가려야 했지만,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또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작용해 우리 가족에게 많은 여행의 흥밋거리를 제공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활약한 윌리엄 월리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브레이브하트"는 세세한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꼬맹이에게는 스코틀랜드의 국화인 엉겅퀴꽃 찾기 미션을, 기념품 숍에 들렀을 때는 엉덩이를 까고 흔들어대는 스코틀랜드 용사의 뒤태를 구경하는 재미를, 네크로폴리스에서 우연히 마주한 윌리엄월리스 기념비를 보았을 때는 놀랍도록 반가운 기쁨을, 글렌코의 넓고도 험한 산악지대를 드라이브할 때는 영화 속 잔인한 전투신을 떠오르게 해 주었다.
여행하는 내내 우리 가족에게 많은 스토리텔링을 건네준 이 영화에 감사하며, 이제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 일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