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슬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퇴근한 후의 일과는 쓰러져 자는 것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른 9 to 6 노동자들에 비해서는 한 시간 일렀지만 피로의 강도는 그렇지 않았다. 세 시간쯤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고팠고 그때부터 밥을 먹는다. 뭘 보면서 먹을 때가 많았는데 밥을 다 먹고도 한참 그것을 보다가 치우고 대충 씻으면 열 시가 된다. 열 시부터는 마음이 좀 조급해진다. 왜냐하면 나는 내일 다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일 출근해서 할 것들을 복기하고, 수업 자료를 미리 준비한다. 게으른 나는 낙천적이지는 못해서 명백히 해야 하는 것들을 하지 않으면 꼭 그것들이 머리통에서 빠르게 회전하며 웅웅 거리는 것 같다. 그러고 나면 이미 열한 시가 훌쩍 넘어있고 그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운동을 하기 너무 늦어버린다.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거나 그저 맥주 한 캔 정도 마실 수 있을 뿐.
이렇게 나의 저녁은 지난 일 년간 단순하게 흘러갔다. 그나마 날씨가 좋고 깨어있을 때는 자전거를 열심히 탔다. 공유 자전거를 빌려 공원으로, 쇼핑몰로, 영화관으로, 때로는 다리 건너 나의 직장으로도 가보았다. 저녁에는 어두워져서 나는 거리 속으로 쉽게 묻힐 수 있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누군가들에게 응시되어야만 하는 직업이기에 저녁의 어스름함 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낮보다 편해졌다.
저 위의 저녁 일과가 ‘저녁 있는 삶’이라는 모토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자주 저녁에도 ‘그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은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는데’에 사로잡혀 있었고 술 먹는 직장 동료들이 나를 불러 내주기를, 항상 바빴던 애인이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하기를 원했다. (낮을 준비하는) 저녁 있는 삶은 그렇기에 자주 피로하고 심드렁했었다.
올해는 다행히 조금 다르다. 몇 가지 사건들을 올해 초에 겪으면서 지속 가능한 혼자 사는 삶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것의 징조는 아주 뚜렷한 낮과 저녁의 경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천사소녀 네티처럼 방과 후 변신해 어디를 털러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낮 말고 저녁의 일거리를 찾았다. 다행히 저녁의 일거리는 화실, 요리, 동네 책방 구경, 글쓰기 강의, 목공, 도서관 다니기 등처럼 밥벌이를 하기 전부터 바랐던 한량의 모습이라 부자연스럽지 않다. 낮에 만나는 사람들과 저녁에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관계를 맺는 장만을 고려하면 낮보다는 저녁에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올해의 내가 생각하는 저녁 있는 삶이란 돈을 버는 낮의 시간이 통째로 없어진다면(마침내 불로소득을 얻게 된다면) 내가 하게 될 행위들로 차 있는 삶이다. 복권에 당첨되고 나서 할 일들에는 당연히 언급되지 않겠지만. 일상적으로 당연히 계속하고 있을 것만 같은 일들 말이다. 저녁 있는 삶이 반짝일 때마다 낮의 내가 없어지고 저녁의 모습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커진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미래와 관련된 새로운 상상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이 친구 집에 놀러 와서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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