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윤 또는 채소김
어렸을 적 기억 중 영상으로 움직이는 기억들은 대부분 6학년 때 정도부터 가지고 있다. 그전에 대한 기억은 스틸컷처럼 몇 장의 사진 정도로 남아있다. 나를 낳은 사람 집의 햇빛 내리는 거실 한편에서 함께 천자문을 외웠던 장면, 나를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의 집에 있던 갈색 강아지, 보호자의 혈족 집 마당과 집 너머의 언덕 정도. 그러다 지금까지 보호자를 자처하는 나의 아빠와 엄마가 나와 오빠를 데리고 그들의 집으로 갔다. 그다음 해였나. 우리 넷은 함께 빨간 티셔츠를 입고 2002 한일 월드컵을 가열 차게 응원했다.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이 여럿이었다. 몰딩은 90년대를 강타했던 힙한 컬러, 옥색으로 말끔하게 되어있었다. 당시 아빠는 물리치료사라는 새 직업에 적응 중이었던 거 같고, 엄마는 중소기업 과장이었나 그랬던 거 같다. 유복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그곳에서의 기억들이 몇몇 스쳐간다. 여름이었다. 오빠와 내가 같이 수두에 걸리는 바람에 보호자들은 우리를 데리고 거실에서 함께 잠을 (거의 못) 자며 부채질과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또 여름이었던 거 같다. 집 앞 주차장은 나와 오빠의 놀이터였다. 방학 내내 롤러스케이트로 주차장을 빙빙 돌았던 추억이 있다.
-
떠돌이의 삶이 지나고, 유복한 시절이 지나가는 찰나였던 거 같다. 넓은 방이었다. 할머니 무릎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회사 이야기 같았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횡령, 소송, 억울하다, 걱정 마라, 뭐 그런 말들이 지나간 거 같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우리 초등학교 졸업생의 대부분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새싹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새싹중학교를 가고, 새싹고등학교를 가는 의례였다랄까. 그런 와중에 나는 ‘극히 일부’에 걸렸다. 코앞에 있는 중학교를 놔두고 버스로 30분 거리의 중학교로 당첨되었다. 서럽고 우울했던 나의 운명에 한창 심란해하고 있을 때, 엄마는 엄마가 다니던 회사와의 불쾌한 재판을 시작했다. 재판은 지난하게 진행되었고, 우리 집 거실에 서류는 쌓여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한번 이사했다. 집은 점점 작아졌고, 나의 중학교와 점점 가까워져 끝내는 10분 정도의 거리에 살게 되었다. 10대 중반부터 10대 끝까지를 보낸 그곳은 기존의 가구들을 버거워했다. 책장은 방을 비집고 들어가 있었고, 진열장은 벽의 너비보다 길어서 불안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식물들은 쇼핑백에 눌러 담은 짐짝들처럼 베란다를 한가득 채웠다. 물을 주려면 호스 끝을 쥐어서 또는 호스를 흔들어서 물을 멀리 날려야 했다. 시간은 흘렀고, 대학교 입학을 앞두었다. 중학교 입학할 때 시작했던 엄마의 재판도 세 번을 거쳐 결국 끝났다.
-
대학교에 입학했다. 기숙사가 싫었다. 자유로 향하는 문턱이라 선망했던 대학은 여전히 선택하지 않은 삶들의 연장이었다. 나를 조여 왔다. 휴학을 했다. 주체로서의 떠돌이 삶을 살아보고자 했다. 호주에서 1년이었다. 1년의 삶은 고되었지만 빛났다. 호주 곳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서빙, 청소, 설거지, 농사일, 카페 알바 등을 했고, 지금까지의 삶 중 가장 넓은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만났던 거 같다. 호주에서의 삶은 지질했던 순간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찌질 오브 찌질의 시간이었지만, 그래서 더 향수에 젖게 되는 순간들이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시간들을 보내다가 어느 날은 문득 도망치듯 나왔던 나의 집과 학교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알바만으로도 의식주가 가능한 그 공간이 부러웠다. 그곳에서 정착하고 살았더라면 더 여유로운 마음과 시간으로 삶을 채웠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당시에도 그랬다. 비자 만기 기한이 다가오면서 돌아갈지, 그곳에 더 있을지 고민을 계속했다. 결국은 명확한 선택을 하지 못 한 채 ‘왠지 돌아가야 할 거 같아서’ 귀국했다.
-
#아오라x비행공간 #aoraxbiheng
#토요윤 #주와삶 #나의살던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