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endtic Hannahism Aug 31. 2023

왜 '구원' 받고자 하는 가?

밤 하늘의 별도 구원할 수 있을 까?

이유를 알지 못하나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위치에서 결여를 느끼고 좀 더 나은 상황 이었다면 하고 가정하면서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현재를 탓하고 구원받기를 원한다. 


오전에  스티븐 핑커의 '우리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으면서 '구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이 구원에 대하여 쓴 책이 아니지만 왜 이토록 선함이든 악함이든 나누어 정의지으려 하고 괜찮다고 안심하고 싶어할 까 싶었다.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고 아는 철학자가 적기에 그 많은 사상을 아울러 엮어서 수 놓듯이 잘 조화롭게 만들 수 없지만 이따금씩 생각을 하다보면 왜 이리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구원'받기 원하는 가 하고 의문 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나는 태어나기를 그런 곳에서 태어나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아니하였고 땅따먹기하듯 야금야금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부터 칸트까지 철학은 기독교적 사상이 강렬하기에 어찌하든 자신이 더럽게 여기는 그 디오니소스적 욕구들을 제어하고 억압하면서, 심지어는 학대하기까지 미워하면서 자신의 한 부분인 욕망, 그것을 부정하고 그것에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청하고 원한다. 


죄라고 여기는 것들 가령 미워하는 마음, 탐하는 마음, 누군가를 육체적으로 원하는 마음, 나태한 마음들은 싫어 버려고 싶어도 인간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초월적 존재가 나타나 나를 건져서 하얗고 깨끗하게 정리된 침대에 눕혀 주듯이 [의]라는 곳에 나를 옮겨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런 초월적 존재는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부터 좋은 것, 선한 것으로 여기던 윤리가 어느 새 해야만 하는 도덕이 되어 의무가 되었고 전체주의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레비나스는 그러한 의무가 오히려 폭력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소들이 전에는 그저 좋은 것들을 선호하고 말따라 미풍양속과 같은 가벼운 느낌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폭력적이고 강하게 자신을 고문하는 기계가 되어 '너는 의로워야 한다. 나태하면 안된다. 너는 모자르다. 약함이 죄이다' 하며 다양한 인간성을 전부 획일화 시키고 강하고 의롭고 세련되고 멋진 인간으로 구원 시키려한다.


왜 '구원'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처참한 존재들인가. 자신에게 증명해 줄 수 없는 것들이 '내가 너의 구세주다' 하고 말하며 확인 할 수 없는 것들로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도록 설득하고 옳지 않다하며 그것은 더러우니 버리라 강요하는 것을 허용해야 할 만큼 우리의 그림자가 추악한 가? 우리가 사막에서 사자가 되어 원한다고 우는 소리가 구원 받고 싶다고 외치는 소리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다움의 무언가는 항상 선함이라고 부르는 윤리적 양심과 함께 악하다고 부르는 미개하고 끈적이는 불쾌한 것들이 같이 존재한다. 빛이 좋다고 하여서 어둠을 없앨 수 없고 별을 밤하늘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내 그림자가 어두울 때 생각이 깊고 타인에 대한 환대가 빛나며 좋고 선함이 아름다운 게 아닌가. 그것이 고문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림에 나타나는 세 여인이 각각 신분이 다르기에 앉은 위치와 자세도 다르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나보다 편하겠지 나보다 덜 고뇌하겠지 생각할 지도 모른다. 각자가 다 구원 받기 원하며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다 엉망이라고 .


그러나 그러한 고뇌도 생각도 자신을 이루는 조각이고 가벼운 세상에 생각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특별함을 줄수 있는, 마치 향수의 가벼움을 잡아주는 패출리나 머스크같은 베이스 노트가 아닌가 싶다. 



작가의 이전글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에 대하여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