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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endtic Hannahism Jul 16. 2023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에 대하여 1

레비나스와 니체도 어떻게 엮일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엉뚱함에 대하여


(이글은 레비나스 수업을 1/4 듣고 쓴 글로 레비나스의 얼굴에 대한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실제 제가 느끼는 얼굴이지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만지거나 할  수없는 것입니다)


코로나에 두 번째 잠식되어 일주일을 온전히 앓았다.

그래도 좀 나아지는 지 매일 2-3시간 자다가

어제는 4시간을 잤다.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고 목은 잦은 기침으로 피가 나고

숨쉬기가 힘들어서 뜨거운 물 컵에 받아 놓고 뜨거운 증기 쏘이는 것으로 적절히 달래고 있었다.

병원은 다행히 코로나 권고라 자주 방문하여 의사선생님의 세심한 조정으로 약을 바꾸고 새벽약도 처방 받아서 점점 괜찮아 지는 것을 느낀다.


아픈 동안에 걱정하는 배려를 받고 집에 계속 혼자 있는 것을

이겨보라고 향수도 선물해주는 것들이 감사했다.

때가 되면 말을 걸어주고 나도 고마워서 대화를 길게 이어가다보면

육신이 아픈 것이 정신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듯이

정신이 받는 큰 안위는 육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말이라도 네가 아프다니 걱정이 되서 신경이 너무 쓰인다. 라는 관심을 받으면 내가 더욱이 타인에게

이런 마음을 더 쓰면서 살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느낀 고마움도 이정도 인데

내가 타인에게 위로가 될 노력을 한다면 나도 그로인해 받는 따뜻함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 감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아픔도 생각해 줘야 하니까.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이라는 개념이 한번 들어온 뒤 부터

그것이 의미 하는 것이 무엇일까 표정인가?

신을 볼 수 있다는 그 얼굴이 언어보다 먼저 드러나서

나에게서 타자를 시선을 옮기게 해준다는데

지금처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나는 어떻게 그 얼굴들을 구분하고 다가갈 것인가 생각이 많이 들기도한다.


세상에 많은 것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다.

좋았던 것이 순간에 싫어진 바 되기도 하고

거들떠 보지도 않던 것이 어느 순간 귀하고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거울 속에 보이는 내 얼굴만 소중히 여기다가 타인의 얼굴에서

그렇게 어려움에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은 삶이구나 하고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상담해주시는 선생님과 이야기 하다가 동성의 얼굴에 대하여 이야기 하게 되었다.


내가 거울을 보면서 내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얼마나 탄력이 있는지 확인해봤자

나는 내 얼굴만 만지기에 그것이 잘 유지되는 것인지 혹은 방치되어 관리가 필요한 상태인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동성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사실 이성의 얼굴은 어떻게 운이 좋으면 만져볼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지만 사실 이성의 얼굴은 다 그런것은 아니지만 내가 관리하는 것만큼 관리 하지 않기에

정말 다양하다. 그래서 내 피부와 비교한다는 것이 큰 의미가 나에게는 없다.

그래서 나처럼 스킨 로션에 에센스도 가끔 바르는 그런 그냥 생물학적 여성인

동성의 얼굴을 조물조물하며 만져본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내가 잠시만 네 얼굴 만져봐도 돼?

상대는 당황하고 이 언니가 왜 내 얼굴을 만지고 싶어하지??

말로는 젊은 사람 피부가 궁금하다 하지만 속이 음흉할지 누가 알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동성의 얼굴은 나도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므로 갖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내것만 만질 수 있다.


마음도 그런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갖고 있고 저 사람도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내 마음밖에 못 보고 저 사람도 자기 마음밖에 못 보겠지.

주체 중심적인 생각은 외부의 것들을 내 안으로 끌어들여서 포섭하고 내 마음에만 관심을 두게한다.

그렇다보면 타자마저도 당연하게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 줘야하는 한 개체로만 보여지게 되고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한다면 내 마음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고 정확하게 보자면 타자라는 존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주체인 내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고 할 수 없으며 내 안에서 보이는 그 사람으로 보이는 형상은

사실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그린 내 원함이 담긴 내 마음이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든지 타인과 대화를 하다가 조금 더 가까워 지고 진솔하게 대하게 될때면

내가 억지로 타자를 끌고 내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기꺼이 마음에 빗장을 열고 들어오듯

나와 만나 주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가까워지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타인의 고통을 체휼하지 않는 이상 공감하기 어렵듯이

상대도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내 마음을 알기 어렵다.

그래서 때로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가 마음을 열어서 이야기를 해줄 때는

그 친구의 얼굴을 만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동고(同苦)라는 단어는 연민의 마음을 참으로 잘 담고 있는 단어인듯하다.

동정과 연민을 구분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시혜적인 마음으로 내가 들어주마 혹은 내가 알아 주마 하고

내가 위에 서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들의 마음을 대할 것이다.

하지만 연민은 동정과는 달라서 상대가 나와 같은 사람인것을 알고 상처받았다면

그 것으로 인하여 심한 고통을 받지 않기를, 내가 그 것을 함께 나눠서 스스로 갇혀있는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롭기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갖고 대하는 것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내게 딱히 잘해준것이 없더라도 마음을 열어준 상대들이 스스로가 만든 감옥속에서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아프지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가 듣고 나도 그런적이 있었노라고 말하며 견디기 위하여 싸워온 자신을 알아주라고 위로하면 상대도 위안을 받지만 나도 나에게 위로가 된다.


그렇다고해서 니체가 경계하고 벗어나라고 말했던 노예의 도덕에 사로잡혀 그 아래 있으면서

타자에게 자기를 잃은 채로 맹목적으로 맞추고 순종하라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아직 내가 배운 부분이 아니기에 확실히 그러하다 하진 못하지만 내가 레비나스 같이 타자를 존중하는 철학을 하겠노라고 한다면 먼저 나도 돌아보고 나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을 것이다.

내가 낙타와 같이 노예로서 굴복해서 살아간다면 타인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는 없을 것이다.

당장 나는 먼 실크로드를 짐을 지고 등에 채운 지방질에 의지하여 목마름을 참으며 유럽까지 가야하는데

내 옆의 낙타가 보일까? 보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와 같이 불쌍한 자 중의 하나로 볼것이지

같이 연민하여 나누는 상태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니체로서 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위버멘쉬로 나아가고

레비나스의 타자를 대하는 마음을 배워간다면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길에서 조금 더 밝은 눈으로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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