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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의 산책길 Jan 21. 2022

내가 죽으면 깻잎장아찌를 올려놔줘

When I die, bring 깻잎장아찌 to the funeral



2021년 11월 24일 수요일

When I die, bring Kkaennip-jangajji to the funeral 




오늘은 아침 7시까지 소공동으로 가야하는 날이었다.

L호텔에서 열리는 행사 진행 보조 알바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때에 단기로라도 일할 수 있는 기회는 복권 당첨이나 마찬가지다.


어제 하루를 늦게 마무리하고 새벽 3시가 다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던 나는

두시간 40분 후에 다시 꾸역꾸역 일어나 잘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부릅뜨려고 애쓰며,

어서 정신 차리고 이불 위에서 나오라고 스스로에게 조용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절대 다시 자면 안돼! 

진짜 큰 일 난다 너!!

게으른 DNA 따윈 없어!!!


기특하게도 내 몸은 나의 무리한 주문을 잘 따라주었고

부엌 식탁에는 무슨 행운인지 상하지 않고, 아직 먹을 수 있는 반찬들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집을 떠나기 전까지 30분 남짓 남아 있었고, 이럴 때 꽤 쓸만한 내 머리는

밥 10분, 씻기 5분, 옷 입기 5분, 화장 10분을 기가막히게 나누고 분주하게 숟갈질을 하게 만들고 있었다.


처음엔 깻잎장아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반찬을 우물거리는 내 기척을 느낀 H가 스르륵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다가왔다.


"반찬만 먹으면 너무 짜"


H는 피곤해보이지만 확실한 판단력을 발휘해 흰 쌀밥과 함께 무언가를 꺼내주었다.


"이것도 같이 먹어봐"


그가 손수 만든 깻잎장아찌였다.



H가 직접 찍어준 사진 한 장 


"빨리 나가야 돼! 나 진짜 괜찮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은근히 긴장한 뇌는 남은 준비 시간을 다시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고,

여기 있는 반찬만으로 충분하다며 손사래치던 나는 꼭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깻잎 장아찌 한 장을 한국인다운 손놀림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 한 장이 입으로 들어가기 전,

고소하고 짭쪼름한 향기가 가라앉은 부엌 공기를 뚫고 코를 훅- 자극했다.


너무너무너무 맛있었다.


어떤 문장으로 이 확실한 느낌을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요리왕 비룡에서 사람들이 맛을 음미하는 그 순간처럼 

애니메이션같은 표현 방식을 사용해보고 싶다.

'이 음식! 정말 굉장한 맛이군!'

H가 깻잎으로 싼 적당한 크기의 밥알을 건낼 때는 이런 기분이 들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어도, 오늘 일이 마냥 쉽지 않을 것임에도

다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수퍼파워를 깻잎장아찌로부터 전달 받고, 그 힘을 전해준 H에게 

고마움을 남발하는 나였다.

그 사이, 

오늘의 주인공인 깻잎장아찌를 만든 H는 어제의 수많은 깻잎장아찌를 만들었던 K를 생각하며 

수십년 전 기억을 입 밖으로 드문드문 꺼내놓고 있었다.

"K한테 배웠어"

"K가 만든 깻잎장아찌가 정말 맛이 좋았지"

"철이 들면서부터 나도 옆에서 도왔었어. 깻잎 씻어라 하면 씻고"

새벽, 정확한 대화 순서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굳이 안해도 될 두어 마디를

 아주 쾌활하게 보태고 있었다.

"K는 천국에 갔어. 이런 맛있는 반찬을 수십년 간 만들었잖아."



"내가 죽으면 깻잎장아찌를 상에 올려놔줘"

그 뒷말들은 뻔한 나와 H의 대화 패턴이기에 과감히 생략-





진심이었다. 나는 H가 나보다 먼저 죽으면 그의 상에 김밥을 무조건 올릴 것이고

혹시 내가 먼저 죽는다면 누군가가 이 날을 기억하고 정말로 간장과 마늘맛이

적절히 어우러진 K와 H가문의 깻잎장아찌를 올려주었으면 좋겠다.

여름에 치뤘던 K의 장례식에는 빨간 육개장과 내 입맛에는 그저그런 수육이 올라갔었다.

K가 정말 원했던 한 가지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졌다,

그에게 장난스럽게라도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 내게는 약간의 후회와 슬픔으로 남아있다.

계절이 바뀐 지금에야 그런 감정들이 느껴져서 

나는 감정을 느끼는 것도 더딘 사람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 내년 K의 기일에는 어떤 음식을 마련해야 할까


주제를 넘나드는 두서없고, 명랑한 새벽의 대화가 

H에게 어떤 느낌과 무게감으로 다가갔을지 나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간장에 알맞게 밴 짙은 녹색을 품은 깻잎 한 장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만큼 아주 가벼웠다는 것.


올해가 떠나가기 전에 내 손으로 깻잎장아찌를 만들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허겁지겁 일터로 떠났다



곧, 무농약 깻잎을 사러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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