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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GBOYOUNG Dec 15. 2020

호시절 1

  호시절 1




  “진짜 부럽다.”

  예전부터 심심찮게 들어온 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으레 하던 말.

  “어려서 좋겠다.”, “아직 한창이네.”

  십대 때나 이십대 때나 때때로 들어온 이런 말들이 재밌는 건, 삼십 대인 지금도 듣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와 관련된 남부러운(?) 말을 들으면 좀 곤란하다. 어릴 때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런갑다’ 내 나이가 부럽고 좋다는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또 달라졌다.


  “와. 진짜 제일 좋을 때다.”

  나이 많은 누가 내게 또 이렇게 말하면, 나는 좀 떠름해진다. 좋을 때라고 말하는 그에게는 ‘과거’의 일일지라도, 듣는 나는 ‘현재’의 일이니까. 그의 말마따나 좋은 시절은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건데, 나는 아직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저기, 그럼 지금 당신은 좋지 않은 때인가요?’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삼킨다. 나를 보는 그는 지금, 어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과거의 그는 그 시절이 제일 좋을 거라는 걸 알았을까. 서른의 그를 만나서 이렇게 묻고 싶어 진다.

  ‘넌 뭐가 그리 좋냐?’

  그러나 그의 서른은 한참 전의 일이므로, 시공간을 뛰어넘지 않는 이상, 만날 수도 물을 수도 없다. 때문에 나로서는 한 번 더 생각해 봐야만 하는 문제가 된다.




  ‘제일 좋을 때.’

  나는 잠시 그의 서른을 떠올리다가, 묻는다.

  “그런가요?”

  되묻는 내게 그는 답한다.

  “그럼! 뭐든 할 수 있는 나이인데. 좋을 때지 좋을 때야.”

  나는 다시 말을 삼킨다.

  ‘그럼 지금은요?’


  이쯤 해서, 또 누구는 내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뭐가 그리 아니꼽냐고. 근데 아니꼬운 김에 조금 더 아니꼬운 시선을 가져보자면, ‘제일 좋을 때’라는 건 대체 뭘까.




  제일 좋을 때.

  머릿속에 각인된, 인상 적인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은근히 많다. 어릴 적 자연농원(에버랜드)에 갔을 때, 학교 땡땡이치고 PC방 놀러 갔을 때, 애인을 사귀었을 때, 공모전에 당선됐을 때, 동생의 결혼식, 가족끼리 여행을 갔을 때 등등. 인화한 사진처럼 그때의 추억이 낱장 낱장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최근의 기억 중에 꼽으라면 강원도 양양으로 서핑을 갔을 때다.

  고향 친구들과 갔는데, 서핑은 처음인지라 간단히 강습을 듣고 서핑을 즐겼다. 작렬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 나는 먼 바다 쪽을 바라보았다. 바닷물이 일렁일 때마다 햇빛이 반들거렸다. 물결은 얼핏 보면 똑같이 반복적인 것 같지만 파도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오지 않았다. 큰 파도를 기다렸다. 원하는 파도에 몸을 실으면 마치 거대한 자연과 한 몸이 된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래사장에 이르러 파도가 부서졌고 나는 다시 먼 바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름의 미적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큰 파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종일 바다와 한 몸이 되어 물결이 되었다.




  근데 이렇게 기억의 이미지들을 떠올리다 보면, ‘제일 좋을 때’라는 말은 좀 어째 다른 차원의 의미를 지닌 말 같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을 때’라는 말을 듣는 순간은 특별한 장소나 만남에서가 아니다. 술자리든 카페든 그냥 얘기를 나누다가 듣는다. 말하는 누군가도 어느 특정한 순간을 짚으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때’라고 했으니, 어떤 부분을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좋을 때’라고 말하는 누군가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자신의 십대, 이십대, 삼십대를 돌아보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제일 좋을 때’라는 건 어느 한 시절을 종합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의 조각들이 아닌, 계절의 흐름처럼 연속적으로 이어진 기억으로써 말이다. 사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각기 나눌 수 있지만 또한 나눌 수 없다. 각 계절을 나열해 쓰면, 동떨어진 걸로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사계절을 분절하여 느끼지 않는다.

  낙엽이 떨어지고 두꺼운 외투를 입으면서, 거리 한 귀퉁이에 붕어빵 굽는 냄새를 맡으면서 겨울이 왔음을 느낀다. 비가 내리고 가로수 나무마다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하고,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며 ‘벌써 봄이네?’하며 봄을 느낀다. 여름은 또 어떤가. 벚꽃 지고 반팔을 입기 시작한다. 트럭에 수박이나 참외를 가득 실은 트럭이 동네를 배회하고 매미 울음이 들려온다. 길어진 해를 보며 ‘이 여름은 대체 언제 끝나나’ 생각한다. 근데 금방 또 은행나무에서 샛노란 잎이 떨어지고, 보도에는 은행잎과 짓이겨진 은행이 가득하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로 연결된 사계절을 감각하면서 일 년을 보낸다. 한해 한해 계절의 흐름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 오 년이 가고 십 년이 간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특정한 시간의 조각들을 소중한 보물처럼 추억으로 간직하게 된다. 그리고 그 특정한 추억이 떠오르는 순간, 그 시절을 감각하게 된다.

  한때 즐겨 듣던 곡을 들으면 그 시절의 기억들이 촤르륵 떠오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일이다. 나는 원더걸스의 「Tell me」나 프리스타일의 「Y」를 들으면 싸이월드 시절,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왠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한 느낌도 있지만, 그 시절이 지금보다 더 좋았던 것 같고 그때가 그리워진다. 보이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없지만, 감각되는 은은한 기억의 한 작용일 뿐인데, 그 시절로 돌아가면 또 어떨까 이러 쿵 저러 쿵 생각하며, 잠시 추억에 젖어 있게 된다. 지금 보다 나은 삶이 더 좋은 삶이, 다시 한번 펼쳐질 것만 같기도 하다.




  좋을 때.

  그럼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말 좋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좋을 때,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면 정말 좋을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좋을 때, 정확히 말해서 ‘좋은 시절’에 대해서라면,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좋은 시절’은 왜 꼭 과거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과거형에서 현재형으로 전복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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