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
전시회의 하얀 스크린에
공원이 비쳤다
거기엔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잎사귀 무성한 나무 그늘의 윤곽선 앞
여름이 넘칠 듯 빛나고 있었다
호수에서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에 맞춰
분수의 물이 날아오르고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느껴본 적 없는 하늘 아래
나는 그 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싱싱한 잎을 따서 품에 간직하고 싶은데,
나의 옷깃 아주 깊은 안쪽
이파리가 움트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잎사귀 끝에서 끝으로
뚝뚝 빗방울 떨어지고
나는 내가 점찍어 놓은 곳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감각처럼
차오르는 초록 잎과 눈 감은 바람과
공명하는 두 개의 그림자
여름 쪽으로 흘러가다가
이미 쥐어 본 적 있는 여름이란 걸 알았을 때
마음에선 나무 냄새가 났다
지면이 젖은 공원에
햇볕이 드리웠다
천장에 달린 프로젝터를 바라보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하얀 스크린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자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엎질러진 물처럼
여름이 쏟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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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영, 「그립」 전문.
앤솔러지 시집 『지구 밖의 사랑』, 넥서스, 16~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