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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거스 Dec 17. 2022

화장실을 되찾기 위하여

여자 화장실을 여자가 쓰고 싶다는데

  2000년 대 당시 유행하던 ‘제3의 인류’, ‘제3의 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공대에 다니는 여학생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지금도 그러하다고 친구가 얘기해 줬다. 여자 공대생의 설 자리는 어디인가...... 또르르). 그 말속에는 비하적인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제3의 인류가 바로 나라니.


  우리 때는 'BK21'(Brain Korea 21)이라는 국책 사업이 시행되고 있어서 공대생을 무척 많이 뽑았다. 기계공학부 신입생이 우리 학년에만 400명이 넘었고, 그중 10%가량이 여학생이었다. 갑자기 공대 캠퍼스에 여학생이 많아진 거다. 여학생을 영입하기 위해 공대 캠퍼스의 동아리들은 나름 노력을 하는 것 같았다. 내 보기에 먹고 놀자판인 동아리는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어 보였다. 대신에 건전한 대학생활을 위해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서 대학원 선배들과 함께 공학에 대한 심도 깊은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도 여학생이 낯선 건 매한가지였다. 과도기였달까. 모두들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 남자들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무런 정보 없이,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경험한 공대 캠퍼스는 정말 낯설었다.


  9 공학관 4층 교수님 실험실에 같이 있던 여자 동기가 화장실에 마음대로 갈 수가 없다며 어느 날 푸념하는 게 아닌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남자 선배들이 여자 화장실에서 선풍기를 씻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당장 확인하러 달려가 보니, 세면대와 화장실 칸 사이의 널찍한 공간에서 선풍기를 씻고 있던 4층 끝방 남자 선배는, 괜찮으니 들어가서 볼일을 보라고 했다. 아니, 문밖에 남자들이 한 무더기로 있는데도 우리더러 들어가라고? 아무리 남녀 구별이 없는 공대라고 하지만 그건 아니지 않은가. 당장 나가라고 우격다짐을 해서 내쫓았다. 그 선배는 끝까지 구시렁대며 나갔다. 그냥 사용하면 될 것을 왜 나가라고 하냐고.

  여자 화장실을 남자 선배들이며, 동기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던 그때의 상황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여자가 너무 없어서 여자 화장실 좀 써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할 것도 없다. 근데 여자가 들어오면 남자는 여자화장실에서 나가기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 당연히 쓰는 화장실조차 그때 우리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라서 배려받은 점들도 분명 있을 거다. 그렇지만 기본적인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했다. 거저 주어지는 건 없었다. 여자 선배라고 해봐야 두 명 밖에 모르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나는 대학본부에 메일을 써서 문제제기를 했고, 다음 날 여자 화장실 입구에 못 보던 팻말이 붙었다.  ‘남학생 출입금지’ 그때 그렇게 공대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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