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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 Dec 05. 2020

내 퍼즐의 빈 틈

당신에게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요?

의학대학원 면접을 봤을때 기억에 남는 인상 깊은 질문이 있다. 그 질문의 주제는 바로 성공.


당신에게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리고 20년 후, 당신은 어떤 목표를 이루었기를 바라시나요?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성공에 대해서 크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가치관 성립이 덜 되어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도 우물쭈물하던 시절이라 성공이라는 개념은 그냥 반짝이는 단어 정도에 그쳤다. "꼭 성공해야지" 라는 말은 참 여러번 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 의미는 몰랐다. 그리고 그런 나의 무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내가 나에 대해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성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23살때 혼자 자취를 했었을 때 무렵이다. 오전에는 학교를 가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가고, 바쁜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자취방은 항상 어둡고 적막했다. 텔레비전을 보지도 않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지도 않았던, 취미생활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내가 혼자 살게 되니 금세 알게 되었다. 내 삶이 얼마나 텅 비고 조용한지를.


꼭 의사가 되겠다며 시험 하나, 성적 하나에 아둥바둥하고 원서에 한 줄이라도 더 쓰겠다며 이리저리 바쁘게 다니던게 3년째가 되던 해였다. '이 과목만 점수 잘 받으면 행복할 거 같아', '이번 시험만 잘 넘기면 소원이 없겠다' 라는 '이번 한번만' 이라는 순간들을 이미 몇번이고 보낸 지쳐가는 시기였다. 그래도 힘겨웠지만 그렇게 수도 없이 빌었던 소원은 몇 번이고 이루어졌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자취도 하게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왜 그리 무거웠을까. 꿈이 있다는 것,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축복인데 뭐가 그렇게 우울한걸까. 왜 나는 계속해서 행복에 조건을 다는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학업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병원일도 하기 싫어지고 모든 일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마음이 힘들었다. 그 중 최악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느리게 흘러갔다는 것이다. 나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뻔하디 뻔한 말을 굳건하게 믿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만큼은 나만의 시간에 멈춰버린듯,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베개에 머리가 닿으면 온갖 생각들로 잠이 오지 않았고, 다음날을 알리는 하루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과 시작하는 것, 그 단순한 일상조차도 버거웠다.


그런 하루들이 반복되자 무서운 확신이 들었다. 목표를 이루는게 성공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해왔는데, 이대로라면 나는 목표를 이루고도, 혹은 "성공"을 하고도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을 들이밀며 지금처럼 텅 빈 삶에 회의감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똑같이 무거울 것이다. 돌이켜보니, 실패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꼭 성공을 하겠다는 간절함으로 하루를 채워가다보니 그 범주 밖의 내 삶과 내 모습은 볼품없이 초라했다. 그런 초라한 내 모습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꿈을 불행의 씨앗으로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내 꿈이 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 성공이 이런 모습이라면, 나는 성공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 순간에도 맞춰져가는 퍼즐 조각들: 퍼즐을 바라볼때 난 웃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성공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행복"이다. 그리고 행복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강아지가 어떤 이에게는 행복을, 어떤 이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그렇기에 성공의 모습도 사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너무나 쉽게 간과한다.


나는 사람을 그 사람이 살아온 모든 순간들의 집합체라고 생각한다. 마치 퍼즐처럼. 우리는 인생의 크고 작은 순간들로부터 "나"를 이루는 퍼즐의 조각들을 하나씩 받는다. 한때 느꼈던 감정, 생각, 주변에 있던 사람들, 혹은 아주 짧은 인연으로부터 현재의 나를 완성해가는 퍼즐의 조각들은 계속해서 맞추어지고 있다. 어느 날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볕이 좋아서 잠시 만끽하는 짧은 순간도, 조각의 크기가 작을지 언정 우리의 어느 한 부분에 자리 잡아 미세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삶이란 존재할 수 없고, 퍼즐의 모양, 색, 크기는 각자 다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성공은 촘촘하게 맞춰진 퍼즐 조각들의 현재 완성본을 봤을때 만족하며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의 모든 순간들을 하나로 모았을때, 작은 미소 하나 띄우고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게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가끔 성공을 좇는다며, 사회가 "성공"이라고 지정한 퍼즐을 자꾸 자기 자신에 끼워 넣으려 한다. 성공은 삶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른 모습을 취하기 마련인데 자꾸만 일반적이고 단편적인 모습의 성공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같은 퍼즐이란 존재할 수 없는데, 일단은 성공적인 것 같은 퍼즐의 모습이라도 갖추면 평균 이상은 될 거라며 공동의 목표인 "성공"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한 번 사는 인생 성공해보자며 열심히 퍼즐들을 수집한다. 결국, 내 퍼즐은 이 조각이 지금 필요하지 않음에도 자꾸만 맞지 않는 조각을 끼워 넣으려 아둥바둥한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내 조각들이 망가져가기도 한다. 그러다 억지로 끼웠을땐, 맞지 않는 조각들 사이에 빈틈이 생기게 된다. 그 빈틈들은 결국 마음의 빈틈으로 자리잡게 된다. 채워지지 않는 텅 빈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만의 성공의 의미를 모른 채, 막연하게 성공을 좇는 건 실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 빈틈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게 되면 결국 잃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끼워진 조각을 나중에 빼내자고 마음을 먹어도, 그 조각들과 이어진 수많은 조각들도 같이 버려야 한다는 아쉬운 마음에 쉽사리 실천하지 못한다.




가장 바닥을 쳤을 때 나는 더 이상 퍼즐의 조각을 받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조각들은 맞춰져가는데 완성되어가는 내 퍼즐이, 내 모습이 싫었다. 특히 아침과 밤에 받는 그 작고 어두운 조각들이 싫었다. 아침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또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한 버거움, 하루를 텅 빈 마음으로 마무리하는 적막함. 그때 난 내 성공의 의미를 다시 정의했다. 피할 수 없이 보내야 하는 하루의 시작과 끝이라면, 그 퍼즐의 조각들만이라도 빛이 난다면, 그렇게 완성된 내 퍼즐도 빛이 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생각들을 거치고 나니, "당신에게 있어서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리고 20년 후, 당신은 어떤 목표를 이루었기를 바라시나요?" 라고 묻는 면접관에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에게 성공은 밤에 침대에 누웠을 때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하게 잠을 청하고, 다음 날에 기분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행복이라는 망설임 없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20년 후에 내 환자들에게도 같은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사지가 멀쩡하고 큰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없는 나도 두려움과 적막함을 느끼는 세상에서, 환자들이 감내야 하는 아픔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밤이 조금이나마 평온해질 수 있을 만큼의 의술과 인격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성공의 정의이다.




자신만의 성공의 의미가 무엇인지 꼭 한번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떤 퍼즐 조각들을 수집하고 싶은지, 내 퍼즐에 빈틈은 없는지, 완성된 퍼즐은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 세세하게 들여다보았으면 한다. 똑같은 삶이 없듯, 똑같은 성공도 없다. 그렇기에 내 고유의 성공을 정의하지 못한다면 그건 목표가 없는 삶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성공하고 싶어" 라는 단편적인 말의 내막에 숨겨진 나만의 퍼즐을 꼭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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