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새날이 밝았다.
happy new year
미얀마에서 인사를 건넨다.
전혀 해피할 수 없는데 그렇게 인사를 보내온다.
그래 happy new year다.
2021년 2월 1일 미얀마 의회가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민 아웅 훌라잉이 이끄는 미얀마군부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도 아웅산 수지와 당 지도부는 구금되고 인터넷은 차단됐으며 군부는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다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문으로 사라졌으며 미얀마의 국민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전기요금을 납부하지 않으며 군부에 저항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투자를 포기하고 다들 떠나가고 빈 공장과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다. 물가는 오르고 화폐가치는 하락해서 국민들의 삶은 너무 피폐해졌다.
그런데도 새 날이 시작되었다.
핀우린에서 호코 농장까지는 차로 1시간 여 정도.
핀우린 시내를 벗어나 물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한 마을을 지나면 차선 없는 좁은 도로를 계속 달린다. 좌회전, 우회전도 없이 루드베키아 흐드러진 울퉁불퉁한 외길을 따라 달리면 된다.
간혹 털모자와 가죽점퍼를 입은 사람들의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하염없이 걷는 들개 한 마리와 산비탈에서 밭을 매는 아녀자들 그리고 맨발로 공양에 나선 스님의 뒷모습을 마주할 뿐 핀우린에서 호코 그 길은 늘 고요하고 아름답다.
제주의 올레길이며 유럽의 산티아고며 미국의 트래킹코스가 있지만 1.5톤 봉고트럭의자에 앉아 몸은 잔뜩 찌그러지더라도 그 길은 아름답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산길을 달릴 때 음악은 위안이 되었다.
2013년 겨울 농장을 시작할 때 매일 그 길을 오가며 라디오도 안 나오고 인터넷도 안되며 전화도 불통인 그 길에서 아이패드에 담아 간 칫로코드락을 듣고 또 들으며 그 노래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미얀마 노래가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리 무심하냐.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사랑을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버스가 없는 이 도시에서 버스 대신 봉고 트럭 짐칸에 앳된 농장 직원들을 태우고 혹시 사고라도 날까 신경 쓰면서 , 때로 기울어진 산비탈 오두막에 사는 학교에 가지 못한 어린 목동들과 칠흑같이 깜깜한 외길에서 고장 난 오토바이를 밀고 가는 청년의 빛나던 눈동자가 스쳐갔다.
칫로꼬드락의 멜로디와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적셔 주어서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미얀마 사람들은 벽돌을 나르거나 땅을 팔 때도 중국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일을 한다.
흙먼지로 혹은 타르를 뒤집어쓰고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린 소년들을 보면 어린 날 한국의 풍경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면 하나씩은 꼭 있었던 레코드 가게에서 들려오던 변진섭, 이문세, 이승환, 산울림, 조용필, 스모키, 퀸, 이런 가수들의 노래에 버스 시간표도 알 길 없이 무작정 기다리던 추운 겨울밤도 덜 외로웠다.
큰 맘먹고 레코드 가게에 들러서 LP판은 못 사더라도 카세트 테이프이라도 장만하면 너무 뿌듯하고 기뻐서 매일 밤 듣고 또 듣던 그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궁핍했지만 그 음악으로 위로받고 힘을 얻었다. 미얀마의 소년들처럼 말이다.
2013년 3월 미얀마에 와서 핀우린 숙소 옆에 우드랜드라는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 레스토랑은 저녁마다 라이브로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가수들의 목소리는 젊은 시절 내가 듣던 버스정류장의 그 노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주로 흘러간 올드팝이나 유행하는 미얀마 가요였는데 그 당시 인기를 끌었던 칫로 꼬드락(Chit loe khall tha lar)이라는 가요를 불러주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테이션 가수들이 있지만 미얀마에도 정식으로 음반을 내지 못한 변방의 가수들이 우드랜드 같은 라이브카페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일과가 끝나는 저녁에 밥 먹으며 맥주 한잔 하러 들러서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면 유쾌해져서 박수를 치고 팁을 주고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뇔린이라는 인도계 남자가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민머리에 청바지와 부츠를 자주 신는 멋쟁이였는데 나와는 동갑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로 가창력이 뛰어났는데 미얀마의 유명한 가수인 Htoo L Lin의 이미테이션 가수였다. 하지만 보통의 이미테이션 가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그를 보기 위한 손님이 많았다.
그와 합석을 해보니 그에게는 아내와 딸 아들이 있다 한다. 가수가 되기 위해 양곤에서 여러 가지 시도를 했으나 돈이 없어 좌절하고 이렇게 카페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며 가며 길에서 마주쳐도 인사를 하던 그가 어느 날 보이질 않아서 수소문하다가 택시 기사에게서 그가 병을 얻어 집에서 지낸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기사가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서 영상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했다. 말소리 또한 명확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중풍이 와서 말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리에 쫙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혁오 같은 민머리로 멋지게 노래하던 그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일까.
한국이라면 여러 가지 재활의 방법도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쓸쓸히 집 안에서 지내고 있을 놀린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다. 핀우린 밤공기를 밝혀 주던 그의 쩌렁한 목소리가 그립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그리 무심하냐.
연인의 사랑에 관한 노래이지만 때로 그 노래에는 이름도 모른 낯선 이방의 가난한 소녀가, 고향을 떠나와 추운 고산마을에서 돈을 벌어 부모님 약값을 보내는 어린 직원들의 마음이 그 노래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또한 여러 번의 군사쿠데타로 피폐한 삶을 살아오고 있는 슬프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미얀마인들의 노래처럼 다가왔다.
개인의 역사 또한 역사 안에 머문다고 쓴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나의 과거와 미얀마의 현재는 그리 멀리 있지 않고 한국과 미얀마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는 이 고독한 길 위에서 누군가가 걷고 또 걸으며 진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칫로꼬드락 그 노래는 한국에서 온 커피 농부의 노래가 되었다.
새 해 새 날을 시작하며 미얀마에 평화가 찾아오는 날을 기원해 본다. 힘없는 국민들을 섬기고 잘살게 하는 그런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도해 본다. 아름답고 착하고 순한 나의 미얀마 친구들이 어서 빨리 평안에 들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