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기형도 기일에 부쳐
1989년 3월 7일에 시인 기형도는 세상을 떠났다, 영화관에서.
2013년 3월 7일 미얀마로 출국하는 즈음의 일기장에는 기형도의 시가 필사돼 있다.
어린 시절 기형도의 시가 나의 불우와 우울을 어루만져 주었던 겨울밤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갔는데 이기적이게도 그의 비극에 내가 기댄 꼴이었으니 두고두고 사과할 일이지만 그가 편편히 관찰하고 기록한 삶의 조각들과 사유는 살아있는 자들에게 뒤늦은 깨달음이 될지라도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먼 곳에서 기형도의 시를 많이 읽었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죄다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그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 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 군데 쓸어 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 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나에게 기형도는 아주 냉정한 충고를 하고 있다. 그것도 저녁의 정거장에서.
아열대 고산지대 한낮의 햇살은 뜨겁고 저녁의 공기는 차갑다. 낮동안에 농장에서 일하고 숙소에 돌아오기 위해 트럭에 오르면 서쪽 하늘로 노을이 붉게 물든다.
황무지를 일구는 하루하루는 고단하고 지치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희망을 노래하겠다는 기형도의 충고를 마음에 새기며 말이다.
2024년 다시 3월
아열대 고산지대의 바람 부는 길 위에서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다.
차에서 내려 마치 실향민처럼 가고 싶은 농장 쪽을 향해, 그곳으로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농장 쪽을 향해 서 본다.
농장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대형마트는 을씨년스럽고 치솟는 물가에 가게들은 텅텅 비었다.
건기의 바람 부는 농장은 정부군과 시민군의 교전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묵는 핀우린은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와서 북적북적하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에 서늘한 고원지대인 핀우린은 놀기 딱 좋은 곳이다.
그래서 식민지시대 영국군들도 이곳에 별장을 지어놓고 휴양을 했겠지만.
집을 떠난 젊은이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선을 목전에 두고, 비극과 상관없어 보이는 젊은이들은 지독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행복하게 웃고 있다.
미안하지만 이제 나는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이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 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가끔 아이들이 나와 요한을 어떻게 생각할까,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햇수로 11년째
미얀마에 커피나무를 심는 농사꾼이 된 우리를 어찌 생각할까.
그걸 왜 했대?
왜 사서 고생일까?
기형도의 시처럼
어쩌다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집을 떠난 나와 요한도, 집을 떠난 앳된 시민군도, 걸어가는 길을 알 수 없다. 정말 의심 많은 길들이 끝없이 갈라졌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희망을 노래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작은 자들의 흔적은 빗방울처럼 소멸되었지만 바람 속에서 구름 속에서 다시 머물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작은 자들의 역사는 성성하게 살아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 마른땅에서 더 화려해지는 부겐베리아처럼 그렇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