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다녔던 교회 성경학교는 나름대로 꽤 재미있는 곳이었다. 지금도 요나나나 삭개오 같은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이 기억에 남는다. 삼손과 데릴라의 이야기는 다음 내용이 궁금해질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나이가 든 지금봐도 스토리텔링과 캐릭터성, 주제의식이 탁월한 이야기이다.
당시 교회 선생님들은 동 시간대 일요일 아침에 방영하는 디즈니 만화동산과 경쟁해야 했다. 티몬과 품바를 볼 시간에 아이들을 TV 앞에서 떼어놔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설교시간을 재미있게 풀어내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어떻게든 재미없는 성경 말씀에 흥미를 붙이도록 하기위해 애써야 했다.
TV와 경쟁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방법은 이쪽도 시각적인 교보재를 쓰는 것이다. 나는 누나를 따라 어느 한 교회 선생님의 집에 찾아가곤 했는데, 그분의 이야기는 언제든 찾아가서 듣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내 기억으론 2층집이었던 것 같고, 30대 중후반 정도 되는 여성분이었던 것 같은데 다양한 교보재를 이용해서 성경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그 당시 들은 말씀 중 뇌리에 각인된 것 하나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가르침이 있다. 하나님은 하늘 위에도 있고, 세상 모든 곳에도 있고, 우리들 마음 속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로 하는 잘못들도 모두 다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마음 속으로 떠올리는 나쁜 생각조차도 모두 다 알고 있다.
굉장히 추상적인 이야기였고, 어린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기엔 다소 난해하고 와닿지 않는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런데 그 당시 교회에 다니던 우리들은 이런 가르침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누구도 복잡한 존재론이나 논리학을 알지 못했다. 저 가르침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려 들면 한없이 난감한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어린 우리는 그냥 있는 그대로 가슴으로 받아 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 위에도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의 모든 곳에 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부르는 명칭부터 '하나(一)'님이고, 한 분인데 어떻게 공간적으로 구분된 여러 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은 굳이 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 나는 그 정도되는 위대한 분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당연히, 우리를 돌봐주시는 하늘 위의 아버지시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땐 유물론과 관념론을 알지도 못했지만 이 내용은 조금 해명할 필요가 있는 내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우리 마음 속에 물질적인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까? 아니면 심리상태와 감정을 이끄는 어떤 힘의 형태로 존재하는 걸까? 이런 의문은 한참 뒤에 종교에 회의감을 느끼게 될 무렵까지 해소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의문 역시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덮어버렸다. 하나님은 위대한 분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 개개인의 가슴 속에 존재하며 우리를 내면에서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하나님 같은 위대한 분이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직관적으로 와닿았다. 사실 지금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기독교의 가르침은 수 천년간 정교한 신학적 논의와 갈등을 통해 형성된 복잡한 사상 체계지만, 갓 세상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릴 때 교회 친구들, 그리고 우리 누나와 나는 하나님을 관념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땐 그 모든 것이 정돈되지 않았다. 교회 친구들과 무언가를 과장할 때 '하나님의 다리에 닿는 수준으로 높다', 혹은 '하나님의 배에 닿는 수준으로 크다' 같은 과장법을 흔히 쓰곤했다.
하지만 그것도 선이 있었는데, 어깨나 목까지 닿는 수준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로 되어 있었다. 그때부턴 불경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대체 누가 그런 조건을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대체로 그런 조건에 대해 다들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 같다.
내 기억에 이런 직관적인 시각에 처음으로 균열을 가한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 들었던 신임 목사님의 설교였던 것 같다. 젊고 잘생긴 목사님이었는데 고작 초등학생인 우리들 앞에서 여름성격학교 말씀 주제로 '유일신과 여타 다른 신앙체계들'을 가져오신 것이다.
그 당시 기준으론 꽤나 고급 수준의 신학 내지 종교학 강의였다. 세상엔 유일신론, 다신론, 범신론, 무신론이 존재한다. 그리고 기독교는 유일신론을 믿는 종교체계다. 목사님은 네 가지 신앙체계를 가볍게 설명한 후 어째서 유일신론이 다른 신앙체계보다 더 우수한지 설교하셨다. 아마 힌두교처럼 온갖 동물모양 우상을 섬기는 다신교가 얼마나 유치한가 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목사님의 의도와 달리, 이런 설교는 나에게 의혹을 남기게 된다. 그 의도는 유일신론의 자명함을 강조하는 것이었겠지만, 나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보편성이 무너지고 상대화되는 기분을 느꼈다. 물론 유일신론을 받드는 기독교가 가장 우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외 대안적인 다른 신앙 방식이 여럿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나이고 하늘 위에 계시면서 세상 어디에나 편재하는 그 하나님을 자연스럽게 믿는 게 아니다. 세상엔 다른 형태로, 다른 신격을 믿는 사람들이 여럿있다.
또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 많은 것들에 대해 처음으로 '분석적 시각'이 더해지게 되었다. 난 진짜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배운 걸 제대로 이해한 게 맞을까? 저 네 가지 구분에 따른다면,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신다'는 이야기는 사실 유일신론보단 범신론의 믿음에 가까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찾아보니 범신론과는 꽤 다르고 범재신론Pantheism과 좀 더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머릿속에 이론적 관점이 더해지는 순간부터 당연한 것으로 믿었던 신념에 조금씩 회의감이 싹트게 된다. 내 경우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이었고, 그때부터 내면에서 항상 두 진영이 싸워왔다. 한쪽엔 나를 둘러싼 그리스도교적인 그 분위기, 그 자명한 세계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자 하는 신앙심이 있다. 반대편엔 이론적 분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회의감에 대응하고자 하는 고민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내적 분열이 생긴 순간부터 어쩌면 자연스러운 신앙심이 이기기 어려운 형국이 되어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