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녹일 수 없으랴
다시 또 벚꽃연금엔딩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따사로워지고, 아파트 단지에는
벚꽃들이 불 켜놓은 듯 환하게 가득 찼다.
추웠던 3월에는 주머니에 손을 꾹꾹 넣고
아직 차가운 바람을 피하느라고 몸을 웅크린 채
아들 둘과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등굣길을 함께 했었는데
얇은 옷차림으로 아파트 문을 나서는 순간
혹시 추울까? 하고 망설이기를 잠시
따스해진 공기에 미소부터 나온다.
아들들도 기분이 좋은지
사진 하나 찍게 잠시 거기 서보라는 말에
군말 없이 포즈도 잡고
뛰어보라고 하면 뛰고
화단 턱 위에 올라가라고 하면 잘도 올라가 준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벚꽃은 또 어찌나 예쁜지
8살 둘째 아들이 작은 손으로 작은 꽃 한 송이를 신나게 들고 선생님을 보여드리고 싶다고 신이 나서
내 손은 뿌리치고 학교 정문을 향해 달려간다.
첫째 아들은 벌써 12살이나 되어서
학교 정문에서 뽀뽀하기 싫을까 봐
'볼에다 뽀뽀해도 됨?' 눈치 보며 물어봤는데 다행히도 비쭉 한쪽 볼을 내어준다. 맘 바뀌기 전에 얼른 그 귀여운 볼에 입 맞추고 들여보낸다.
회사에서는 오후 세시쯤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는데 '배 변호사 바빠요? 스타벅스나 잠시 다녀올까요'라고 팀장님이 듣기 좋은 말을 건네준다.
스타벅스도 봄맞이는 한창인데 팀장님이 신상이라며 사준 '피스타치오핑크롤'에 '라이트핑크자몽피지오'를 같이 베어 물면,
그 피스타치오핑크롤에 코팅된 분홍색 초콜렛이 내 책상 위에 벚꽃이 후드드 흐드러지듯이 초콜렛 조각조각이 마구 흩뿌려진다.
까만 초콜렛이 마구 조각조각 떨어지면 아오 이거 어떡할꺼야 했겠지만
봄에, 피스타치오핑크롤의 분홍 초콜렛 조각들이 조각조각 떨어진다는데,
어머 아름답네 한번 미소가 지어질 뿐이다.
정말 크게 달라진 상황은 없다.
회사도 그대로, 내 상황도 그대로, 정말 다 똑같다.
단지 한 가지, 따뜻해진 봄 날씨에
여기저기서 생명의 기운이 움트며
아름다운 꽃망울들이 터져주니
니맘도 내맘도 살살 녹아버린다.
찌뿌둥했던 마음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삶도 죽음도
계절의 변화도
시간의 흐름도
어쩌면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닌데
순간순간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들을
잘 누리며 살아가는 게 의미 자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