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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Jun 13. 2022

조금은 이른 여름휴가 이야기 - 1

부산 태종대와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그저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견뎌온 5월이었다.


일주일에 세 번이라도 운동하는 습관을 작년부터 어렵사리 만들어두었는데, 목 끝까지 밀려오는 업무에 나름의 루틴이 물거품처럼 망가져버렸다. 덕분에 몸 여기저기가 찌뿌둥했고 한 번씩 스트레칭을 하자면 크고 작은 근육들이 조용한 비명을 질러댔다.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마다 마음속에선 사찰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고요한 절 한편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싶을 뿐이었다.


5월 마지막 주말을 오전부터 자정까지 근무했기에 6월 1주 차에는 대체 휴무를 사용할 예정이었고, 사찰에 대한 향수 덕에 휴가의 목적지는 자연스럽게 경주로 정해졌다. 숙소나 교통편은 따로 살펴보지 못하던 중에 다른 일정으로 인해 급히 부산에 방문했고, 그렇게 올해의 여름휴가는 남쪽의 도시에서 조금 이르게 맞이했다.


내가 잡은 숙소는 광안리 근처였다.

하루의 일정을 마친 후 바로 부산행 기차를 타고는, 가장 먼저 바다가 보이는 헬스장의 이용권을 알아봤다. 휴가의 첫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해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헬스장으로 향했다. 바다에 인접한 도시답게 뜨거운 햇볕이 헬스장 실내로 번져 들어왔다. 운동을 하니 몸에서 열이 나고, 그만큼 사고의 속도는 더뎌졌다.


운동을 엄청나게 즐기는 것도 잘하는 것도 아니지만, 대부분의 신체 활동에는 머리를 잠시 멈출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몸을 바쁘게 움직이는 것 말고는 어떤 식으로 생각의 전원을 꺼두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오전 9시 운동을 마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2박을 묵었던 광안리 근처 오피스텔에서 캐리어를 챙겨 나와 J를 기다렸다.




J와 처음 만난 것은 2016년 11월, 페루 국경을 넘어 볼리비아로 향하던 때였다.


야간 버스를 타고 국경지역인 푸노(Puno)로 넘어온 날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남미 여행 중에는, 특히 도시 간 이동을 하는 중에는 세상의 소식을 접하는 것이 어려워, 다음날 아침 푸노 터미널에 도착해서야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TV 뉴스로 접할 수 있었다.


선거기간 내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승리가 확정된 듯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소식은 매우 놀라웠다. 특히 경험해본 '미국'이라고는 1년간 지낸 캘리포니아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였던 나였기에, 더욱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아는 것은 그 국가의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었을 뿐. 다양성을 표방하는 나라, 그 안에서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와 깊어지는 갈등을 선거 결과와 함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국경에서 바라본 페루의 푸노(Puno)와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Copacabana). '코파카바나' 표지판 아래 개 한 마리가 누워있다.


그렇게 터미널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으며 뒤늦게 세상의 소식을 접하고, 볼리비아 입국 절차를 밟기 위해 출입국 사무소에 줄을 섰다. 여행자에게 친절한 나라인 페루를 떠나려니 조금 긴장이 됐는데, 같은 줄에 베테랑 여행자로 보이는 한국인 두 명이 서있어 눈이 자꾸만 그리로 향했다.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사무소의 직원은 여권에 도장을 쾅 찍어주었다. 곧바로 티티카카 호수 중간에 떠 있는 태양의 섬(Isal del sol)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를 탔는데, 배 안에서 또 그 두 사람을 만났다. 서로가 한국인임을 확인한 후 그들과 처음 나눈 대화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와 일행 A : “혹시 그거 아세요?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대요.”
J와 그의 일행 Y: “에이, 뉴스 못 본다고 거짓말 마세요. 안 믿어요."


태양의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 탄 작은 배 / 해 질 무렵, 태양의 섬의 풍경




부산으로 떠나기 며칠 전, 그 항구도시의 악센트를 지닌 J가 생각나 ‘내가 곧 부산에 가게 되었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그리고 휴가의 둘째날, 약 3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멀리서 온 친구를 위해 운전대를 잡은 J는 먼저 영도 태종대로 향했다. 울창한 숲을 따라 경사진 길을 걷느라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남쪽 도시의 기온은 확실히 서울보다는 따뜻했다.


그렇게 얼마나 올라갔을까, J는 나를 보고 양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좌측에는 ‘가파른 길’ 우측에는 ‘완만한 길’이라고 적혀있는 화살표가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듯 가파른 길을 선택했다.


광안리에서 바라본 바다, 태종대에서 멀리 보이는 도심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어느 순간 탁 트인 풍경에 푸른 바다가 극적인 모습으로 펼쳐졌다.
바다 위에는 선박 몇 척이 천천히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제법 큰 배들이었겠지만 내가 서있는 곳에서는 장난감 배 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저 멀리서 우뚝 서있는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보였다.


경사진 길을 걸어오며 숨이 차오르는 순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순간. 비로소 바닷바람을 폐 깊은 곳까지 들이 삼켰다.


이렇게 깊고 큰 숨은 오랜만이었다. 공기에는 물기와 소금기가 어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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