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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나 Jun 26. 2022

조금은 이른 여름휴가 이야기 - 3

신경주역과 경주역, 성동시장

J가 내려준 부산역에서 SRT를 타고 신경주역으로 가는 데까지는 고작 27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SRT가 Super Rapid Train의 약자라고 누군가 말해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진짜 잘 만든 이름 맞네…’ 이것보다 적절한 이름을 지어주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또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또래 중 대부분은 어릴 때 경주를 가봤다고 하지만 나는 예외였다. 부모님 말로는 가족들과 함께 가본 적도 있다는데 정작 내가 아는 경주는 교과서에서 본 석가탑과 다보탑, 석굴암이 전부였다.


내가 그 도시를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스무 살의 여름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대학시절 로망이었던 ‘내일로’를 떠났는데, 찌는 더위 속에서도 어찌나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당시 방문한 월정교, 양동마을 등 모든 장소의 이미지가 작렬하는 햇볕 아래 찍은 사진처럼 희뿌연 형태로 남아있다.


스마트폰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 그늘 한점 없는 곳에서 3G폰으로 겨우 검색을 해 찾아간 노란 벽의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내어주신 얼음 띄운 오미자차,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유리컵 표면에 맺혀 흐르던 물방울... 이런저런 추억을 떠올리다 보니 금방 신경주역에 도착했다.




왜 ‘신경주역'일까 싶었는데, 11년 전 무궁화호를 타고 도착했던 ‘경주역’은 2021년 12월 폐역 되어 이제는 경주역을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한다. 구 경주역이 개역한 1918년엔 기차역이라면 사람들이 자주 오갈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게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점점 많은 사람들이 자가용을 소유하고 생활하는 모습이 달라지면서, 분주한 시내에 기차역이 위치해야 할 필요성이 적어진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 설렘과 낯섦을 지켜보았을 그 공간을 생각하니 괜스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2021년 12월을 마지막으로 폐역된 '경주역'

나는 역에서 내려 경주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성동동으로 향했다. 성동동에 있는 '성동시장은' 구 경주역을 마주 보고 있는, 경주에서 가장 큰 전통 시장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조금 늦은 시간대 때문인지, 종식되지 않는 전염병 때문인지, 폐역으로 근방의 유동인구가 줄어서인지, 시장 특유의 활기가 주춤한 분위기였다. 아마 세 가지 모두 그 이유겠거니 생각하면서, 나는 영업을 하고 있는 음식점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점심 이후로 무거운 짐을 끌고 경주까지 이동한 터라 꽤 허기가 졌다.


성동시장의 시그니처 메뉴는 ‘우엉 김밥’과 ‘매운 순대’인 것 같았다. 혼자 오는 여행에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이럴 때다. 먹고 싶은 메뉴는 많은데, 다 먹을 수는 없다는 걸 너무 잘 알 때. 좀 더 호기심을 돋우는 ‘매운 순대’를 선택하고는, 곧장 순대가게로 입장했다. 아마 순대볶음 같이 매운 양념을 곁들인 순대일 것이라고 추측하면서, 호기롭게 1인분을 주문했다.


곧이어 내 앞에는 순대 한 그릇과 소금, 막장이 놓였다. 먼저 순대를 하나 집어 들고 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이럴 수가… 순대 자체가 엄청 매콤한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경주의 매운 순대는 청양고추를 갈아 넣어 속을 채운다고 했다. ‘쓰읍- 쓰읍-’ 소리를 내고 물을 벌컥벌컥 마셔가며 순대를 먹었다. 옆에서는 식당 아주머니들이 팔자 눈썹을 하고는, 경상도 억양이 섞인 상냥한 말투로 ‘아가씨 많이 매워요?’ 하며 단무지를 가져다줬다. 




경주의 숙소가 있는 동네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가 걸린다기에 슬슬 걷기 시작했다. 초여름 밤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꽤 시원했다. 시간은 8시 정도로 그렇게 늦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번화가를 벗어나니 가로등이 없어 사방이 금세 어두컴컴해지고 주변의 풍경이 논밭으로 변했다.


내 앞에는 한 중년의 부부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걷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OO 씨 아이요? 내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긋다”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놀라 “어마, 거 누고? △△이 니 맞나?” 되물으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3인의 대화가 이어졌고, 나는 본의 아니게 풀벌레 소리와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함께 밤길을 걸었다.


비로소 밤 같은 어둡고도 긴 시간, 서울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고요함, 그렇게 생기는 마음의 여유.
내일은 늦잠을 자야지 생각하며 침대에 몸을 뉘였다.


고요하고 아름다웠던 6월 초의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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