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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여행 Oct 08. 2022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

쿠바 산타클라라

어딜 가나 CHE다. 쿠바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눈길 닿는 곳엔 여지없이 체 게바라의 얼굴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티셔츠에, 비스듬히 눌러쓴 베레모에, 큰 칼로 돼지고기의 목살을 잘라주는 정육점 아저씨 뒤 낡은 시멘트 벽에.

체 게바라에 대한 책 한 권 읽지 않았다. 영화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 구입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DVD는 체 게바라가 남미 횡단 여행을 시작함과 동시에 나 또한 꿈나라 여행을 떠난 탓에 미처 다 보지도 못하고 여행을 떠나왔다.

그의 삶은 모른 채 지나가는 풍월로 들은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맞닥뜨린 CHE는 다소 압도적이다. 80년대 말 민주화 투쟁에서 돌 하나 던진 기억은 없지만 ‘혁명’, ‘투쟁’, ‘해방’, ‘게릴라’라는 단어만으로 피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사상도 이념도 없이 감상만으로 뜨거워진 피는 우리를 체 게바라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이끈다.

아바나에서 동행한 ‘뭣이 중헌지’ 알고 있는 여행자와 함께 택시를 빌려 산타클라라로 향한다. 별스러울 것 없는 시골길을 달리다 화장실이 급해 들른 마을은 민낯 그대로의 쿠바 모습이다. 비포장의 진흙길을 걷다 만난 쿠바노는 가던 길을 되짚어가며 나를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쿠바는 시간도, 공간도, 그 속에 있는 사람들도 천천히 흐른다. 화장실을 찾고 있는 나만 급하다.


체 게바라의 동상과 쿠바 국기가 확 트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다. 하얀 구름 떼는 체 게바라의 동상을 돋보이기 위해 마련한 무대 장치 같다. 동상의 크기가 쿠바에서의 체 게바라가 어떤 존재인지 말해준다. 동상 밑에 체 게바라의 글이 조각되어 있다.

‘영원한 승리를 향해,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체 게바라의 투쟁은 끝이 났는가, 지금의 쿠바는 승리한 국가인가, 억압받는 민중이 없는, 모두가 평등한 진정한 사회주의가 실현되었는가? 아르헨티나 출생의 그에게 조국은 어디인가? 아니, 그에게 조국은 어떤 의미일까? 쿠바 독립 투쟁 후 아프리카 콩고와 볼리비아 독립 투쟁에 참가한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억압받는 민중이 있는 곳이 그의 조국인가?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오르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CHE의 동상은 여전히 총을 들고 있다. 지금 총을 든 CHE가 바라보는 곳은 어디일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체 게바라 박물관에는 체 게바라의 흔적을 모아놓은 전시관과 체 게바라의 무덤이 있는 메모리얼(추모관)이 있다. 1967년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총살당한 체 게바라의 시신은 1997년 쿠바 산타클라라에 안치되었다. 체 게바라와 그의 혁명 동지들이 안치된 추모 관을 돌아 나오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도 숙연해진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의 흔적을 따라가며 그의 삶을 그려본다. 출생 신고서부터 혁명가가 되기 전의 흔적들, 의대생 시절의 물건들, 혁명가 GHE가 스쳐간 것들은 모두 소중한 보물이 되어 전시되어 있다. 마침내 CHE는 쿠바의 전설이 되었나 보다.



체 게바라 박물관 옆 기념품을 파는 작은 가게에 손님은 없고, 주인 할아버지와 어린 손녀 두 명이 지키고 있다. 아이는 자기보다 어리긴 하지만 비슷한 또래를 만나 반가운지 기념품 파는 가게에 들락거린다. 기념품이 살 생각이 없던 우리는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아이가 쿠바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야구방망이 열쇠고리를 들고 온다.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셨단다. 남편은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작은 기념품이라도 하나 사야겠다며 아이와 함께 가게로 향하더니, 더 난처한 표정이 되어 돌아온다. 기념품을 사니까 할아버지께서 또 다른 선물을 아이에게 준 것이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대가 없이 준 선물이 도리어 우리에게 부담을 준 것 같아 할아버지도 난처했던가보다. 옆에서 우리를 보던 ‘뭣이 중헌지’ 아는 아저씨께서 배낭여행의 베테랑답게 안경걸이와 카드 모양의 돋보기를 내밀며 할아버지께 드리라고 주신다. 아저씨는 여행을 할 때 현지인을 만나면 줄 가벼운 선물을 사 가지고 다니신다고 한다. 우리도 한국을 상징하는 마그넷을 사 오긴 했는데, 번번이 가지고 나오는 것을 잊어버린다.



산타클라라 시내는 지금까지 만난 쿠바와 다르다. 깨끗하고 세련된 분위기에 활력이 넘친다. 춤과 음악이 넘쳐흐르는 아바나와의 생동감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다. 쿠바노들과 나란히 앉아 길거리 피자를 먹으며 산타클라라를 즐긴다. 아바나와 트리니다드에서 보지 못한 대형마트가 보여 반가운 마음에 들어간다. 물이 있다. 그것도 많다! 나는 물을, 남편은 아바나 클럽을, 아이는 탄산음료를 사들고 나온다.

갑자기 아이가 “언니~”하며 달려간다. 트리니다드에서 만난 여행자들이다. 혼자 떠나온 여행에서 마음이 맞아 산타클라라에서 같이 다니고 있다는 아가씨들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다. 한 친구가 핸드폰을 잃어버려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 중이라고 한다. 우리는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걱정을 하며 함께 방안을 모색해본다. 여행 경험이 많은 ‘뭣이 중헌지’ 아는 여행자가 핸드폰을 잃어버렸을 경우에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이야기해준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같이 고민하고 걱정을 해 준 덕분인지 아가씨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조심하자!


비달 공원으로 들어서자 ‘GRACIAS FIDEL(감사합니다 피델)'이라는 현수막 아래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행사 요원의 마이크 소리가 겹쳐 시끄럽다. 무대 아래에는 발레복을 입은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줄을 서 있다.

유치원 아이들부터 대학생(?)까지 나이순으로 펼쳐지는 춤 공연이다. 공연의 진행방식이 매우 신선하다. 공연자의 연령이 높아질수록 춤의 수준도 올라간다. 무대 위와 무대 아래의 사람들 모두 우리에겐 이국적인 풍경이다. 공연을 보고 있는 아이는 이국의 풍경 안과 밖을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다. 어떤 이들에겐 우리의 모습이 이국적이겠지.





산타클라라를 나와 마나카 이즈나가 타워로 향한다. 사탕수수 밭의 노예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탑이다. 탑에 오르기 위해 1 쿡(=1달러)을 내면 된다. 조상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짜내던 감시탑은 화수분이 되어 후손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다. 감시탑 입구 너른 터에 동네 아낙들이 직접 수놓은 하얀 이불과 테이블보, 앞치마, 옷 등을 빨래처럼 널어놓고 판매하고 있다. 하얀 천들이 펄럭이는 모습이 감시탑만큼이나 눈길을 끈다.

탑 위를 오르며 내려다보는 풍경은 영화 속 엔딩 장면 같다. 오후의 태양 빛을 받은 하얀 천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가고 있다. 위로 오를수록 줌 아웃되는 풍경들이 사탕수수밭 노예들의 아픔마저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니, 앙꼰 해변의 석양이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택시 기사에게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냐고 제안한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우리를 태운 택시는 태양과 나란히 바다를 향해 달려간다. 바다를 본 아이는 무작정 바다로 뛰어간다. 바다에 다다른 아이는 바다를 보더니,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며 나를 쳐다본다. 아이의 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앙꼰 해변은 모래사장이 길게 뻗은 평범한 바다다. 바다가 특별나면 또 얼마나 특별나겠냐마는 ‘앙꼰’이라는 낯선 이름에 그럴듯하게 어울릴만한 특별한 해변을 생각했었나 보다. 석양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은 바다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하늘과 바다가 맞붙은 곳 틈 사이에 끼여 있는 해를 본다. 하늘과 바다 사이의 해는 입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아이스크림 조각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듯 그렇게 사라져 버린다. 석양의 아름다움은 지금부터다. 해가 사라지면서 남긴 빛깔이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기를 기다린다. 사방이 어두워진다. 석양이 흐지부지 사라져 버린다. 하늘에 길게 드리운 구름이 해가 지기 전에는 장관이었는데, 구름의 두께가 너무 두꺼웠나 보다. 석양빛이 구름을 뚫고 나오지 못한다. 바다도 하늘빛을 닮았다. 앙꼰 해변의 석양은 그렇게 아쉽게 막을 내린다.


새벽부터 달린 하루가 고단하다. 숙제처럼 남겨진 체 게바라의 삶이 고단함에 돌 하나 더 얹어 놓는다. 한국에 돌아가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따라 남미 대륙을 횡단해 보리라. 이번엔 체 게바라 뒤에 앉아 조금은 친해진 그들을 향해 손 흔들며 인사하고 싶다. “Hola, Am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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