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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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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토리 Mar 31. 2021

록의 역사 2화 - 비틀즈가 삼켜버린 세상

1960년대를 집어삼켰던 비틀즈를 소개합니다.

1950년대 말 이후 침체기에 빠졌던 로큰롤은 엉뚱하게도 영국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영국은 원래 그 이전까지 스키풀(Skiffle)이라는 재즈의 일종인 장르가 유행하고 있었죠.

하지만, 미국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에 밀려 영국에 진출한 로큰롤 가수 빌 헤일리가 히트하면서 상황은 뒤바뀌었습니다. 빌 헤일리의 로큰롤은 영국에서 노동자 계층과 젊은이를 중심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그리고 빌 헤일리가 뿌린 작은 씨앗은 전 세계를 집어삼키는 태풍이 됩니다.


Beatles의 데뷔 싱글 Love Me Do

Beatles

1962년 첫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하며 혜성처럼 떠오른 비틀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밴드가 아니었습니다. 1957년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가 처음 만난 이래로 데뷔하기까지 5년 동안 눈물 젖은 무명생활을 해야 했죠. 리버풀과 함부르크의 여러 클럽을 전전하며, 하루에 8시간씩 연주했고 연주가 끝난 후에는 다락방에 모여 생활했습니다. 심지어 무희들 뒤에서도 연주하며 온갖 종류의 무대를 다 경험한 비틀즈는 이때 연주나 퍼포먼스에 관한 기본기를 탄탄히 다져놓죠.


브라이언 앱스타인

이렇게 인디 생활을 하면서 차츰 인지도를 쌓아가던 비틀즈는 ‘비틀즈의 영원한 매니저‘ 브라이언 앱스타인의 눈에 띄어 메이저에 데뷔하게 됩니다. 앱스타인은 비틀즈의 데뷔 앨범 계약을 따내기 위해 여러 음반회사를 찾아다녔는데, 번번이 거절당했고 그중 EMI와 어렵게 계약을 맺게 됩니다. 특히 데카 레코드는 EMI보다 먼저 비틀즈를 만나 1시간에 가까운 오디션까지 보는데, 결국 비틀즈를 탈락시키고 말죠. 이 일은 대중음악 역사상 최악의 판단으로 손꼽히며, 반대로 비틀즈를 잡은 EMI는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음반회사로 성장합니다.

데뷔 후 비틀즈는 승승장구합니다. 첫 정규앨범은 타이틀곡 Please Please Me를 비롯해 거의 전곡이 히트했고, 30주 동안 차트 1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이 앨범을 1위에서 밀어낸 건 다름 아닌 비틀즈의 두 번째 앨범이었죠. 하지만 브라이언 앱스타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비틀즈에게 영국은 너무 좁다고 생각한 그는 더 넓은 무대로 눈을 돌립니다.


Beatles의 브리티쉬 인베이젼

1964년 2월 7일, 비틀즈는 로큰롤의 본고장 미국으로 향합니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 ‘브리티쉬 인베이젼’의 시작이었죠. 사실 비틀즈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불안해했다고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 출신 뮤지션이 미국에서 성공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이 미국에 도착하자 이러한 걱정은 우스워졌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는 1만 명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열광했죠. 이틀 후, 비틀즈는 당시 최고의 인기 TV 쇼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합니다. 이날 이 쇼는 7천3백만 명이 시청했고 시청률은 60%가 넘었습니다. 차트 석권 또한 당연한 수순이었죠. 활동기간 중 16장의 앨범을 빌보드 1위에 올렸고, 특히 64년 4월 4일에는 팝 역사상 불멸의 기록을 수립합니다. 빌보드 싱글차트 1위부터 5위까지 싹쓸이했고 이외에도 top 100위 안에 31위, 41위, 46위, 58위, 65위, 68위, 79위를 랭크시켜 총 12곡을 차트인하는 경악스러운 기록을 세웠죠. 64년 한 해 동안 미국의 총 음반 판매량에서 비틀즈가 60%를 차지하는 정도였습니다.

비틀즈를 기점으로 이제 로큰롤은 완벽하게 부활했고, 향후 수십 년간 록 음악은 팝의 주류로 군림하게 됩니다. 사실 비틀즈는 차트 기록도 대단하지만,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비틀즈가 대중음악에 이렇게나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비틀즈에게는 단순한 인기 외에도 뭔가 있었고, 1967년 그 모든 역량을 응축시킨 앨범이 하나 발매됩니다.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Sgt. Pepper's Lonely Heart Club Band 앨범이 발매되고 동시대의 음악인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사실 초기의 비틀즈는 멜로디에 의존한 단순한 사랑 노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물론  멜로디라는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좋긴 했지만, 이러한  때문에 그들의 음악성을 의심하는 전문가와 팬도 많았죠. 하지만 실험적 성격이 강한 페퍼 상사 앨범이 발매되고  이상 그들의 음악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게 됩니다. 비틀즈와 음악적으로 경쟁하던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은  앨범을 듣고 경쟁을 포기해버렸고,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한 클래식 음악 진영에서도 격찬을 아끼지 않았죠. 훗날 롤링스톤지는 역대 500 명반을 발표하는데,  앨범을 1위로 선정하기도 합니다. 워낙 명반이기 때문에    곡이 주옥같지만, 그중에서도 앨범의 마지막 트랙 ‘A Day in the life 백미로 손꼽힙니다.  레논,  매카트니가 각각 작곡한  노래를 연결한 독특한 구성을 취하는데, 여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불협화음의 향연은 대중음악이 성취할  있는 예술적 경지의 극치라는 평가를 받죠.


Abbey Road

이후에도 비틀즈의 실험은 계속됩니다. 페퍼 상사에 버금가는 명반으로 손꼽히는 White AlbumAbbey Road에서는 존, 폴 콤비에 가려졌던 조지 해리슨까지 음악적 역량을 뽐내며 비틀즈의 색깔을 더욱 다채롭게 했죠.  

비틀즈의 음악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프로그레시브, 사이키델릭, 발라드, 헤비메탈, 레게 등 세상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을 접목 또는 창시했죠. 비틀즈 이후 모든 록 음악은 비틀즈의 변주 또는 응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다룬 음악의 폭과 깊이는 어마 무시했습니다. 이처럼 언제나 새로운 음악을 찾고자 했던 실험정신이 바로 비틀즈와 일반 아이돌 밴드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가르던 지점이었죠. 언젠가 폴 매카트니는 “200년 전에는 모차르트, 바흐의 음악을 들었겠지만, 앞으로 200년 후의 사람들은 비틀스 음악을 듣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은 분명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한편, 비틀즈가 성공가도를 달리던 60년대, 비틀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틀즈만큼이나 걸출한 괴물 밴드들이 당시 영국에는 득실거렸고, 이들이 비틀즈의 성공을 본따 미국 시장을 노리면서 팝 음악 시장의 판도는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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