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생화학은 처음이라
예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던 '짤'이 있다.
문과의 암울한 현실... 을 웃기게 표현한 커뮤니티 글의 캡처인데,
문과 출신의 억울한 마음을 한의사만 이해해 주더라, 로 끝맺어지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한의대는 교차지원이 가능해 과 내에 문과생이 드물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 나름대로 심오한 밈이었다.
입시요강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과 입학생 중 10% 정도가 문과생이었다.
문과생들은 각기 성향도 다르고, 잘하는 것도 서로 달랐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을 보였는데,
바로 과학과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신입생 때, 필수교양으로 일반화학과 일반생물 과목을 모두 수강했어야 했는데 이는 많은 문과생들을 다시 수능의 길로 이끌곤 했다.
암기로 해결되는 일반생물 과목은 양반이었다.
일반화학은 고등학교 때 관련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라면 상당히 막막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과목이었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때 화학을 공부한 적이 없는, (대신 생물을 배웠다) 문과생 중 하나였다.
위에서 말했듯, 동기들의 90%가 이과생들이었기에 어디서든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 함께 다니는 삼총사 중 한 명이 화학II를 선택한 인재였고, 화학 까막눈인 나와 나머지 한 명에게 화학을 가르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 참 복이 많은 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스스로의 의지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지 않나.
그런데, 당시의 나에게는 화학을 공부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나마 삼총사 중 또 다른 문과 친구만이 친구가 해주는 과외를 쏙쏙 흡수할 뿐이었다. 그래도 훌륭한 과외선생은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끌어다 앉히고, 예상문제를 떠먹였다.
그 덕일까, 화학은 C+ 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사실 교수님이 많이 봐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해의 생화학 수업이었다.
일반 화학을 등한시했던 건, 그 과목에서 배우는 것이 환자를 진료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마음속 안일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왜 몰랐을까. 신입생 때의 '필수'과목은 추후 수강할 과목의 발판이 된다는 사실을.
초보 몬스터 한번 사냥해보지 못한 채 던전에 들어간 초보 게이머가 된 기분이랄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맘때쯤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나는, 생화학만큼은 C+에서 벗어나리라 마음먹었다.
생화학의 첫 수업 날, TCA 사이클에 대해서 배웠다. (10년 가까이 지났는데 이 글을 쓰면서 저절로 떠올랐다. 나 정말 열심히 했다!) 기본 지식이 전혀 없어 따라가기 벅찼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통째로 외워가며, 동기에게 물어가며 수업진도를 따라갔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광기 어린 집착이었던 것 같은데, 교과서를 집에 들고 가서 매일 복습까지 했다! 아 물론 다른 과목은 그렇게까지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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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들인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역시 출신은 못 속이는 건지(?) 내 생화학 도전기는 B+로 막을 내렸다.
한의사가 되고도 밥을 무작정 굶는다거나 하는 환자들에게 애증의 TCA 사이클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종종 온다. 설명을 시작하다가도, 눈에 띄게 집중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가끔 보이면 대충 이야기를 갈무리한다.
'꺾이지 않는 문과생'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