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인생에도 내비가 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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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모범생 쪽이었다고 감히 말해 본다. 그렇다 보니 내 선택은 늘 대중적인 쪽이었다. 누구여도 선택할 선택지를 고르고 그래 잘했어, 란 말을 듣는 일에 지독하게 익숙했던 거다.
앞에서 말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병원으로 진로를 정할 때만 해도 주변의 많은 동기들이 병원에서 일하고 싶어 하던 시절이었다.
그렇다 보니 당시의 나는 스스로의 선택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경쟁을 뚫고 전문의가 될 기회를 얻었을 때도 순수히 기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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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일을 시작하고는 내 선택의 무게가 제법 버겁다는 걸 느꼈다. 나는 집과 멀리 떨어져 일을 했기 때문에 살 집이 없었으며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생겼던 빚이 있었고 인턴 월급은 적었다.
현실 앞에서 굳건히 서기에는 내 다리가 가냘프게 떨렸다.
내가 가는 길이 샛길이라는 점도 한몫했다. 한의사 전공의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만큼 그 수가 적다. 다수와 다른 선택을 한 적이 처음이라 불안했다.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맞나,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불쑥 나를 찾곤 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그동안 불안은 꾸준하게, 그러나 불현듯 날 찾곤 했다. 일에 대한, 직업에 대한 애정과 보람을 쌓아도 불안은 봄날의 먼지처럼, 내 주변을 은은히 맴돌았다.
그렇게 4년 차, 나는 지금도 여전히 불안하다.
인생에 내비게이션이 있었다면, 하고 바랐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목적지도 방향도 없는 인생에 애초에 내비게이션이 있을 필요도, 있을 리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3년이 지나고 이리저리 잔뼈가 굵은 나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도 그 나름의 의미와, 재미가 있다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오스카상을 휩쓴 희대의 명작,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알파 웨이먼드가 그런 말을 한다.
매 선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평행우주가 생성된다고. 그리고는 말한다.
주인공 에블린은 모든 평행세계에서 가장 아무것도 못하는 에블린이며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어쩌면 지금의 나는 모든 평행세계에서 가장 못난 나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다.
‘경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괜히 붉은 글씨로 화면을 꽉 채우니 지레 겁이 날 뿐이다. 오히려 그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혹시나 지금 이 순간 불안한 나의 동료가 있다면 내 이야기가 조금은 힘이 되기를.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