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6

진심을 버리고 살아남은 나

by 디자이너 야니

월요일 오전 10시.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스무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몇 달째 이어진 수업이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나는 여전히 과거의 나를 본다.

간절히 배우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하는 마음들.


"오늘은 브랜딩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볼 거예요."

슬라이드를 넘기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브랜드는 결국 정체성의 문제거든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도 알 수 없어요. 그래서 브랜딩 작업은 항상 같은 질문부터 시작해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강사님, 그런데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게 가능한가요? 저는 저조차 잘 모르겠는데요."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평생 찾아가는 거예요. 완벽하게 알 필요는 없어요. 조금씩,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거니까요."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내 말의 무게를 새삼 느꼈다.

그 말은 학생들에게 하는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에이전시로 향하던 길에 출판사 편집자에게 전화가 왔다.

"작가님, 원고 반응이 정말 좋아요. 독자들이 많이 공감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다음 작품 계획도 있으시죠?"

"천천히 생각해볼게요."


전화를 끊고 미소를 지었다.


『사랑의 끝에서, 나를 선택했다』. 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건 처음엔 두려웠지만, 지금은 담담하다.

완전한 회복을 선언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스스로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는 고백.

그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에이전시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3년 전 혼자 시작한 공간은 어느새 여섯 명이 함께 일하는 사무실이 되었다.


"대표님, 오후 3시에 신규 클라이언트 미팅 있으시고요, 그 전에 잠깐 확인해드릴 게 있어요."

막내 디자이너 은지가 자료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때 문득, 예전 같으면 지혁에게 '점심은 잘 먹었어?'라는 안부 메시지를 보냈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 생각은 구름 그림자처럼 스쳐갔고, 마음엔 아무런 흔들림도 남기지 않았다.

예전엔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했는데, 이제는 그냥 지나간 시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그 감정을 더 이상 나의 삶을 이끄는 기준으로 삼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업무를 마치고 직원들과 함께 저녁 회식을 했다.

오랜만에 팀원들과 웃고 떠들며 술잔을 주고받는 시간이 낯설지 않고 편안했다.


회식 장소에서 나와 걷던 중, 우연히 지혁이 다니던 헬스장 앞을 지나쳤다.

한때는 돌아서 걸었던 길인데, 오늘은 무심히 그 앞을 지났다. 그리고 그 순간, 나 자신이 놀랐다.

그 사람은 이제 나의 오늘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이름이 되었다.


그때 내 옆에서 걷던 은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연애할 때 어떻게 해야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요즘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 자꾸 불안해져서요."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상처받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상처받아도 괜찮을 만큼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게 중요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상대방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는 나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야 사랑도 더 건강하게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 얼굴을 보며, 나 자신이 정말 달라졌음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진심이면 돼’라고 말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진심에는 지혜가 함께 필요하다는 걸.

감정만으로는 관계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수없이 무너진 끝에 알게 되었다.


그때 민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회식 많이 늦게 끝나?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올 수 있으면 같이 맥주 한잔 할까?'
'좋아. 이제 끝나서 들어가는 길이야. 9시쯤이면 집에 도착할 것 같아.'


단순한 대화지만, 이런 게 진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잃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민준과 처음 만난 건 2년 전. 출판사 에디터였던 지인의 소개로였다.

이미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익힌 후였기에, 그를 만났을 때도 ‘이 사람이 나를 구해줄까’라는 기대도, ‘내가 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오만도 없었다.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평온할 수 있겠다. 더 이상 누군가의 온도에 휘둘리지 않고도 나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그와 함께일 때 처음으로 또렷해졌다.


겉모습만 보면 그는 지혁과 닮았지만, 본질은 달랐다. 지혁의 침묵은 회피였고, 민준의 침묵은 존중이었다.

민준은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말보다는 일관된 행동으로 신뢰를 보여줬다.

그는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고, 내가 그를 구해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우리는 각자의 경계를 지키며, 필요할 때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였다.




집에 도착하니 민준이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두었다.

연어 샐러드와 치즈, 시원한 맥주 두 병.


"오늘 어땠어?"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시며 그가 물었다.


"학생들이 좋은 질문을 많이 해줘서 즐거웠어. 그리고 출판사에서 다음 책 이야기를 꺼내더라."

"벌써?"

"응. 근데 아직 쓸 이야기가 명확하지 않아서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그는 내 일에 관심을 보이지만, 결코 재촉하지 않는다.

그 적당한 거리감이 고맙다.


"당신은 어땠어?"

"오늘은 꽤 흥미로운 케이스가 있었어. 상속 분쟁인데..."


그가 차분히 자신의 하루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게 일상이구나.

특별하지 않지만 따뜻한,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시간.


밤 11시. 민준이 먼저 잠자리에 들고, 나는 노트북을 열어 오늘 하루를 정리한다.


'나는 진심을 버리고 살아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을 바꾸려는 진심을 버리고,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진심을 찾았다.'


그 문장을 쓰고 잠시 멈췄다.

진심을 버린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과거에는 누군가를 위해 나를 깎아냈다면, 지금은 나를 돌봄으로써 사랑할 자격을 갖춰가는 중이다.


'사랑은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방향이 바뀔 뿐이다. 나는 이제 그 사랑을 나에게 먼저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충분히 채워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노트북을 덮고 조용히 방 안의 조명을 껐다.

하루의 끝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서자, 은은한 불빛 아래 민준이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자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조심스레 앉아, 고요하게 오르내리는 가슴을 바라보았다.

그가 나에게 주는 평온이 방 안에 가득했다.


이불을 들고 그의 곁에 누운 나는, 조용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민준은 스르륵 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은 채 속삭였다.


"오늘도 고생했어."


그 한마디에 마음이 천천히 풀렸다. 긴장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감정은 잔잔하게 번졌다.

폭풍 같은 사랑은 아니지만, 오래가는 감정. 고요하고 깊지만 단단한 감정.

그런 사랑 속에서 나는 오늘 하루를 정리했다.


창밖의 한강이 밤의 장막 속에서 조용히 흘렀다.

물은 언제나 자신의 길을 찾아 흐르고, 장애물을 만나면 부수기보다는 돌아간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더 이상 누구도 구원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만은 온전히 구원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나로, 세상과 만나기로 했다.


내일은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강의가 있고, 미팅이 있고, 민준과의 조용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내가 사랑하는 일상이었다.


나는 그 끝에서 나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오늘도 여전히 옳다고 느낀다.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였다.

타인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나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가장 오래간다는 걸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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