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개미의 세상살이
취미란 무릇 잉여로워야 한다.
실용적인 취미도 좋긴 하지만 일상의 삶과 완전하게 유리된 취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삶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 잠시 삶을 외면하고 싶을 때, 철저하게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을 받고 싶을 때,
바로 그때 철저하게 삶에서 떨어져 나온 취미가 도피처가 된다.
잉여로움의 끝
이제 연필이라는 필기구는 비효율적이다.
적을 수 있는 종이도 있어야 하고 조금만 쓰다 보면 깎아야 할뿐더러, 쓰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굵기가 변한다.
필사라는 행위도 비효율적이다.
Ctrl+C, Ctrl+V라는 간단한 행위로 몇 초만에 가능한 일을 몇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연필로 하는 필사는 잉여로움의 끝을 보여주는 취미 중 하나이다.
필기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이라면 연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연필은 필기구를 좋아하는 이들의 종착지와 같은 존재이다.
필감이나 느낌은 추상적이니, 가장 현실적인 척도인 가격으로 비교를 해보자면,
굴러다니는 중국에서 만든 조잡한 연필들은 보통 몇 백 원 수준이지만,
취향이 확실한 이들이 고르는 카스텔 9000(파버카스텔), 마스 루모그래프 (스테들러), 그라프 스톤 (까렌다쉬), 블랙윙 (팔로미노)는 한 자루에 1000 ~ 7000원 정도다.
연필은 소모성 필기구이니 개인별로 편차가 있겠지만 얇은 노트패드 한 권을 필사하는 데에도 10자루 정도가 필요하다.
여담으로 그라폰 파버카스텔 (파버 카스텔사의 고급 브랜드라 생각하면 된다.)의 퍼펙트 펜슬은 한 자루에 몇 만원이다.
이 정도 가격이라면 깎을 때마다 내 살이 깎여나가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각 연필 별로 필감이 다르고, 같은 브랜드 내에서도 경도(HB, 2B, 4B 등 - 참고로 H는 Hard를, B는 Black을 의미한다. H값이 높으면 딱딱한 대신 연하고, B값이 높으면 무른 대신 진하다.)에 따른 느낌이 다르다 보니 나에게 맞는 연필을 고르기란 쉽지 않다.
특히 블랙윙같은 연필은 수많은 베리에이션이 존재하다 보니 알면 알수록 고르기가 어려워진다.
연필에는 필연적으로 깎기라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연필을 깎는 것을 쉽게 하려면 전동 연필깎이를 구입해서 윙~ 넣고 돌리면 끝이겠으나,
취미의 영역에 들어섰다면 직접 깎는 것도 즐기는 방법 중 하나이다.
정말 제대로 연필 쓰는 분위기를 내고 싶다면 오피넬(프랑스제 폴딩 나이프, 연필을 깎을 용도라면 No.6 모델을 권한다)로 정성스레 연필을 깎아보는 맛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나의 경우엔 연필을 깎은 후 날리는 흑연가루와 예쁘지 않은 결과물로 인해 수동 연필깎이를 사용 중이다.)
아무런 실용성을 가지지 못한 글을 쓰는데 필요한 연필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라면 경제적인 잉여가 필요하고,
취향에 맞는 연필을 써보고 쓰기 전에 원하는 굵기로 다듬고 깎기 위해서는 시간적인 잉여가 요구된다.
이러나저러나 비효율을 감수하고 쓰기 위해서 얼마큼의 잉여가 있어야 한다.
필사는 또 어떠한가?
이미 쓰여 있는 글을 베껴 쓰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글을 쓸지는 필사를 취미로 하는 이들에겐 항상 다가오는 고민 중 하나이다.
신앙심이 깊어 경전이나 성서 등을 필사한다거나, 감동받은 장편 소설을 필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필사의 주제를 정하는 일은,
결국 독서가 필연적으로 필요하다.
글을 쓰려면 글밥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필사를 하려 해도 뭔가 감동받아 한 번 써 보고 싶은 글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글을 읽는 행위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감동받은 글을 골랐다 하더라도 직접 글을 쓰는 데는 예상외로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필사를 하면 책 한 장에 이렇게 많은 글이 들어있는지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눈으로 몇 분 걸리지 않고 읽어 내려갔던 한 장을 손으로 옮겨 적는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에 놀란다.
독서를 위한 시간, 그리고 필사를 하기 위한 시간, 결국 잉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팁 하나, 연필로 필사를 하려면 미리 서너 자루 이상 깎아두어야 한다. 만년필은 잉크 양을 체크해야 하고. 필사 중 연필을 깎거나 잉크를 넣는 일은 나에겐 정말 별로였다.)
연필로 책을 필사하는 취미를 한동안 가졌었다. (지금은 주로 만년필로 필사를 하곤 한다.)
당시 나는 카스텔 9000을 사용했다. 취미로 사용하는 연필 중에서는 개중 가장 저렴하기도 했고 (저렴해도 한 자루에 1000원 넘지만…) 최초의 육각 연필이라는 이미지, 품질 좋은 삼나무의 바디와 균일한 연필심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글을 쓸 때 사각사각 들리는 소리는 내가 연필을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하게 전해주었다.
노트는 클레르퐁텐, 로디아, 복면 사과 등을 두루 사용했다. 만년필과 달리 비침이나 번짐을 크게 걱정할 일이 없어 종이에 대한 부담은 적었다.
늦은 밤, 방 안의 불을 끄고 스탠드만 달랑 하나 켜 둔다.
그리고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릴 듯 말 듯 낮게 깔고, 책을 펴서 글을 한 글자씩 적어 내려간다.
사각사각하는 종이 위를 긁는 연필 소리를 들으면서 적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간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지러운 날엔 어김없이 글자도 흐트러진다.
조금 더 적다 보면 다 잊혀지고 간간히 들리는 음악소리와 연필 소리만 남는다.
그렇게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면 뭔가 정화된 느낌을 받는다.
삶이 꼭 실용성으로 가득 찰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끔은 이렇게 잉여로움이 가득한 즐거움으로 채워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