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개미의 세상살이
예전, 아주 먼 예전에는 책을 보물 다루듯 했었다.
책을 한두권 구입하는 것도 아닌데 한 권 한 권 정성스레 비닐로 책을 쌌다.
책을 볼 때도 완전히 펼치지 않고 구겨질까 조심조심 들쳐보았고,
줄을 치거나 메모를 하는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때는 그렇게 읽어도 내용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더 이상 조심스레 읽어서는 머릿속에 남는 것이 없었다.
조금만 난해한 책을 읽을 때면 앞 장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가 하면,
주석을 읽기 위해 책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좀 전까지 읽었던 내용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후였다.
책 한 권을 읽을 동안 페이지를 앞으로 뒤로 바쁘게 뒤척거려야 했다.
읽은 조각들이 퍼즐처럼 머릿속을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있었기에 읽는 내내 필요한 다음 조각을 찾기 바빴다.
시간이 더 흐르자, 이젠 머릿속을 날아다니는 퍼즐 조각조차 사라졌다.
아예 노트를 옆에 두고 필요한 부분을 적어야 했다.
줄을 치고 메모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책 한 권을 소화할 수가 없었다.
먹을 것을 앞에 둔 소화불량에 걸린 사람마냥, 읽을거리를 앞에 두고도 읽어내기가 어려워졌다.
노트에 적는 것으로는 한계가 다가왔다.
옮겨 적는 내용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적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걸렸다.
줄을 치고 메모를 하는 것도 문제가 생겼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책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도중에 구입하기도 했다.
그래야 읽었던 내용에 줄을 치고 메모를 적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 절판된 책이나 재고가 부족해 주문 후 받는데 시간이 걸릴 경우엔 며칠 전 떠올랐던 생각을 깡그리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사람들마다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아이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iOS의 기본 앱인 메모를 사용하기로 했다.
(아마 메모가 내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앱일 것이다. 나의 최애 앱이다.)
책을 읽는 중간 필요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줄을 치고 메모 앱을 이용해 옮겨 적는다.
상황에 따라 키보드를 이용하여 텍스트로 기록하기도 하고, 양이 많거나 그림이 필요한 경우라면 메모 앱의 스캔 기능을 이용한다.
이 방법으로 한동안 행복함을 되찾았다.
독서의 효율성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언제 어디서라도 전화기(아이폰)만 있다면 동일한 형식으로 독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고 있던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이 다가왔다.
(광고받고 쓰는 글이 아니니 업체명을 그냥 쓰겠다. 혹시 ‘밀리의 서재’ 관계자가 계신다면 무료 이용권을 부탁드린다.)
밀리의 서재를 이용 중인데 전자책을 구독하는 방식이 좋은 점은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더라도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철학서적이나 고전을 읽을 때 쉽게 풀어쓴 2차 서적을 몇 권 읽고, 원서를 읽는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2차 서적을 더 읽고 원서를 다시 읽는 식이다.
예전이라면 도서관에서 2차 서적을 빌려서 죽 읽은 후 원서를 구입하고, 막히면 다른 서적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전자책을 구독하면서 이러한 불편함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냥 손가락 움직임 몇 번으로 여러 권의 책을 오가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예전처럼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페이지를 스캔할 필요 없이 그냥 필요한 내용을 바로 선택하여 메모로 보내면 끝이었다.
필요한 내용은 얼마든지 쉽게 긁어 메모로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주석을 보기 위해서 책장을 헤집고 다닐 필요 없이 주석 번호를 살짝 눌러주는 것만으로도 주석이 있는 페이지로 워프 하듯 옮겨졌다.
주석을 읽는 도중에도 몇 번이든 다시 원문을 읽을 수 있었고, 오가면서 읽을 수 있는 편리함은 더할 나위 없었다.
특히 옮긴이의 주석이 길게 달린 고전의 경우에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편했다.
(지금 읽고 있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더욱 절절히 느끼고 있다.)
편리함이란 효용만 따진다면 사실 종이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종이책의 감성이 여전하지만 주석이 서너 페이지 달린 책 두세 권만 읽다 보면 감성이고 뭐고 간에 전자책이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혹시 어떤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스피노자의 ‘에티카’,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다윈의 ‘종의 기원’ 같은 책을 종이책으로 한 번,
전자책으로 한 번 읽어보면 확실히 와닿는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책의 내용 정리가 자동으로 되어간다.
내가 하는 것은 필요한 부분에 줄을 긋고 iOS의 메모 앱으로 보내는 것뿐이다. (대부분의 전자책에서 지원한다.)
윌라와 같은 오디오북은 나에겐 부족한 부분이 꽤 많았다.
듣고 지나치기엔 아까운 내용들을 붙잡아 둘 방법이 없었다.
밀리의 서재와 같은 구독형 전자책은 기존의 종이책의 불편함을 꽤 많이 해소해주었다.
특히 책 내용을 정리한다는 측면에서는 비교가 무의미한 수준으로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전자책으로 읽고 내용을 정리했음에도 책장에 종이로 된 책을 꽂아두고 싶은 욕구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책에서 건져내야 할 내용을 모두 건져냈고, 필요하면 나중에 정리된 내용을 읽거나 책 전체를 다시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리적인 실체로써의 책이 가지고 싶은 설명 불가한 욕망이 여전히 마음 한켠에 웅크리고 있다.
책에서 필요한 내용을 줄을 칠 때 다양한 색깔로 표시가 가능하고, 줄을 친 부분에 메모를 남기면 모두 자동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그뿐만 아니라 두꺼운 책이 몇 권이 되던 전원이 공급이 되는 장소라면 아이패드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얼마든지 독서가 가능하다.
그런데 줄을 치고 메모를 적을 때,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다.
안타깝게 그게 불가하다. 때론 나만 알 수 있는 기호를 남기고 싶을 때도 있고, 기분을 남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적은 메모를 지우거나 덧칠한 흔적을 모아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먼 훗날 이런 변덕과 엉뚱함의 역사가 나의 독서 편력을 더욱 재미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전자책으로 읽은 책은 깔끔하다.
정확하게 직선으로 균일한 색깔로 그어진 선과 줄을 그은 내용이 한 글자의 오탈자 없이 메모에 옮겨진다.
지나치게 정확해서 뭔가 맛이 빈 듯한 느낌이다.
분명 편리하고, 높은 효용이 있음에도 예전의 불편함을 동경하게 만드는 오묘함이 있다.
오묘한 불편함이 있긴 하지만 이미 전자책이 편리함에 푹 빠져버렸다.
다시 돌아가기엔 이미 많이 왔고,
다시 돌아가기엔 책장의 빈 공간이 너무도 부족하다.
한 동안은 오묘한 매력의 전자책과의 동거를 이어가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