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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안 Aug 23. 2021

그냥 마음에 드는 걸로 할래요.

배부른 개미의 세상살이

한바탕 가성비 논쟁이 벌어졌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 직장인에게 마우스와 키보드는

전쟁터에 나선 고대 전사들의 칼과 방패에 다름없다.


물론 때에 따라 업무 효율 상승을 위해 개인 모니터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개인의 선택은 마우스와 키보드에 한정된다.

취향에 따라 굴러다니는 유선 마우스에 멤브레인 키보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금 관심이 있거나, 장시간 업무로 불편함이 겪는 경우에는 자신에게 맞는 마우스나 키보드를 구하곤 한다.


가성비 논쟁의 시작은 키보드였다.


가성비를 옹호하는 이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굳이 회사에서 쓰는 키보드를 좋은 것을 쓸 필요가 없다.

- 비싼 가격이 아니더라도 좋은 품질(키감, 만듦새)의 제품도 많다.


가성비를 집어치우고 무조건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는 쪽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하루 종일 손에 닿는 키보드인데 무조건 좋은 것, 마음에 드는 것을 사야 한다. 사용시간을 생각해봐라.

- 키보드 한 번 사면 몇 년은 쓴다. 어설픈 것을 구입하면 몇 년을 아쉬워해야 한다.


들어보면 둘 다 일리 있는 논리였다.



키보드뿐이겠는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번에 구입하는 제품이 마지막 혹은 마지막에서 두, 세 번째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조금 더 지불하더라도 정말 마음에 드는 제품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곤 한다.


키보드 논쟁을 지켜보면서 처음에는 가성비를 옹호하는 이들의 의견에 마음이 살짝 기울어졌다.

돈을 벌자고 다니는 직장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기능상 부족함이 없는 제품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굴러다니는 멤브레인 키보드면 어떠한가? 그것도 충분히 쓸만한데…


한참 일을 하던 중  키보드의 타건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 종일 키보드 위에 내 손가락이 올려져 있고,

흘려듣고 있지만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가 내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몇 년을 써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키보드는 원하는 단축키에 손가락을 가져갈 수 있었다.

제대로 된 기계식 키보드를 산다면 아마 퇴직할 때까지 쓸 수 있을 것이고,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바꾸지 않는 한)

괜찮은 펜타그래프식 키보드를 사더라도 몇 년은 너끈히 쓸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몇 년간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인데 고작 몇만 원 더 주고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사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조금 무리가 될지라도 마음에 드는 좋은 것을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졌다.

업무 능력 향상 같은 효용을 집어치우더라도 내가 매일 같이 써야 하는 건데 조금이라도 마음에 든다면 감정적으론 그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정말 마음에 드는 선택을 한 후에 후회한 경험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엔 정말 무리한 선택이고, 도를 넘는 것 같았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그때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가성비를 따지면서 감성의 만족과 비용을 저울질한 것치고 오래도록 남겨져서 뿌듯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별로 없는 듯하다.

감성의 만족이 아닌 기능의 만족을 위해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라 기능의 충족 그 이상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능을 대체할 것이 생기면 미련 없이 내보낸 까닭이다.


가성비를 만족시키는 합리적인 선택과 충만한 만족감을 가져올 감성적인 선택 중 어느 것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충만한 만족감을 선택할 것 같다.


어렵지만, 어렵지 않은 척 쿨하게

그냥 마음에 드는 걸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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