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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필 May 06. 2022

빗물에 젖은 하얀 집은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마크 로스코 그림

 빗물에 젖은 하얀 집은 마법처럼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지붕과 반짝이는 잔디와 반짝이는 울타리가 꿈속에서 나온 환상처럼 현기증 마냥  있었다. 하얀 집은 수줍게 자신의 작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익사하는 여자의 길게 뻗은 목처럼 밤은 파란 강물 속에서 꿈꾸고 있었다. 그 때문에 바람은 오도 가도 못하였고 어느 것이든 끝을 가진 것들은 빗물을 떨구며 울고 있었다. 세상이 그 눈물 닦는 소리 빼고는 고요했다. 바람 소리가 낮게 나는 새처럼 위로 솟구치고자 하는 힘을 세게 누르고 있었고 길은 입술을 깨물고 죽은 자를 생각하듯 누워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것 빼고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길 양옆에 드리운 기다랗고 연약한 곡선의 팔을 가진 나무들은 바람의 손끝에 닿고 싶은 듯 가지를 흔들었고 그것이 작별인사였는지는 과거에 남게 되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하얀색 집이 나왔는데 누구든 그 집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속에 사는 자신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만큼 아름다운 집이었다. 하얀 집 앞에 지어진 낮은 난간의 울타리와 담요처럼 땅을 끌어안는 잔디의 작은 손들, 창 아래 피어난 장미꽃. 행인들의 상상력을 발휘시키기엔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집이었다. 그런 집의 문이 그 파란 밤 아래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밤이 그 속에 들어앉아 있었고 잔디들은 숨죽여 낮게 웅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틈으로 집 안이 엿보였다. 그러나 구름이 지나가는 찰나에 어두워져 그림자 연극을 하는 상자처럼 어둠에 잠겨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어렴풋이 검은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동물의 뼈같이 굴곡진 실루엣이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그 뒤로 서 있는 램프는 커튼으로부터 비추는 밤의 어슴푸레한 빛을 등지고 무대 위에 선 듯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구름이 걸음을 옮겼고 빛이 하얀 집 위에 비추었다.

 반쯤 벌리고 있는 입 사이로 하얀 이빨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입술은 장미 꽃잎의 둥근 끝을 본뜬 듯 둥글게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는데 파란 밤의 빛깔에 검게 보일 뿐이었다. 눈동자는 비에 맞은 듯 반짝거리고 쏟아진 컵처럼 마룻바닥 위에 작은 물길을 내고 있었다. 속눈썹이 그 위에서 돋아나는 모습을 보고 봄이 왔구나 싶었다. 나는 처음에는 놀랐다. 동물의 살가죽 같이 늘어져 있는 실루엣이 그녀일 것이라곤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동물이라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녀의 손목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검붉은 색 무언가가 그녀의 손목에 도사리고 앉아있었다. 피.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뒤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푸른 밤의 공기를 맞으며 그 붉은색이 씻겨져 내릴 때까지. 그 붉은 피가 내게서 씻겨 땅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다음 날 아침에서야 사람들은 흰 집에 누워 있는 그녀의 죽음을 알아차렸다. 경찰들이 색색 불빛을 켜고 달려 나왔으며 완벽한 하얀 집이 그 화려한 불빛 아래서 한층 돋보였다. 처음 그녀를 목격한 사람들은 두 노인이었다. 그들은 장을 보러 가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오랜만에 군에서 자기 아들들이 돌아온다고 덧붙인 말에 경찰관들이 시체 앞에서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얀 집 옆에 사는 이웃들은 아침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내가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 말에 경찰관들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피는 듯 그들을 쭉 둘러보더니 내 집으로 들이닥쳤다.

 “아니, 그 바보 녀석 집이잖아? 그냥 바보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아직 모르잖아. 섣불리 판단하지 마.” 그 옆의 경찰관이 초인종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들은 햇살이 강하지 않았지만, 눈을 잔뜩 찡그리고 내가 문을 열길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었다. 경찰관들은 녹아내리고 있는 듯이 느리게 계단 위에 한쪽 발을 올리더니 나에게 몇 마디를 하고는 수갑을 채웠다.

 감옥으로 가는 길은 생동감 넘치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탄 차는 바람에 스치며 비행기 소리를 흉내 냈고 머리카락이 타닥거리며 달리는 발소리를 흉내 냈다. 감옥도 나쁘지 않았다. 하얀 벽은 반짝이는 집처럼 말끔하게 서서 햇볕을 쬐고 있었고 쇠창살의 차가운 감촉이 여름밤에 맞은 소나기의 감촉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람들이 가득 찬 커다란 방 안에 서 있게 되었다.

 “용의자는 지적 장애인이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인자로 지목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살해 현장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살해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여전히 없습니다.”

 변호사는 나에게 여러 말을 했다. 말하는 직업의 사람인만큼 많이 말했다. 내가 유일하게 현장 근처에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손목에 그어진 자국이 자살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각도를 보아 타살로 판명 났다고도 했다. 나는 그날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서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얀 벽을 몇 시간 동안 바라보다 보면 하얀 벽 위로 기억들이 날아든다. 그러다 보면 삶은 마치 꿈처럼 하나의 장면으로 남게 되고 나는 더 살아있지도 죽지도 않은 것처럼,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가만히 앉아있게 된다. 사형 집행 전에 마지막으로 흰 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죽기 직전의 내가 회상하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날 나는 사형대에 앉아 흰 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게 한 가지 수수께끼만 남겨두고 나는 날아갔다. 파란 하늘은 익사하던 그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다.


 마을의 끝에는 놀이공원이 있다. 작고 늙은 놀이공원은 금요일 날 밤에서 토요일 밤까지만 열었는데도 돈을 많이 벌었다. 놀이공원에는 롤러코스터도 있고 회전목마도 있었고 번지 점프도 있었다. 특히 번지 점프 직원은 특이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날이 맑은 하늘에 붉게 노을이 질 때면 번지 점프 끝에 앉아있곤 했다. 담배 연기가 노을을 감싸며 피어올랐다. 그 속에서 타들어 가는 재에 붉은 눈처럼 피로한 해는 하늘로 손을 뻗다가 느리게 추락했다. 번지 점프 직원은 그 모습이 번지 점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날아보고 싶어서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려서는 결국 추락해 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거미줄 끝에 매달린 파리처럼. 그녀 자신도 번지 점프를 자주 했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서 살아있음은 꿈을 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노을을 바라보아도 노을을 온전히 볼 수는 없었다. 그 강렬한 붉은빛을 담아내거나 마시거나 피어댈 수도 없었다. 온전한 노을을 그녀는 간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죽음이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진실한 생명은 죽음이 되었다. 그녀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돌아갈 때면 몇 번이고 노을을 다시 보았다. 혹시나 완전히 노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 빛나는 모습을 영원히 자신의 눈앞에 세워두고 싶었다. 그녀는 그런 더딘 걸음으로 집에 가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금방 냄새를 맡았다. 그녀에게서 나는 신선한 죽음의 냄새는 생각을 뚫고 그녀의 옆에 담배 연기와 섞여 날고 있었다. 그게 그녀의 순전한 생각일 뿐인지 살해의 동기인지는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번지 점프를 극도로 자주 한다는 이유로 정신적 문제를 제기받았고 그녀의 퇴근 경로가 하얀 집을 지나친다는 근거가 추가되자 두 번째 용의자가 되어 하얀 방에 갇히고 말았다.


 죽은 여자가 사는 매끄러운 거리에는 집 하나를 걸러서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회사에서 돌아와 집 현관의 노란 불빛 속에서 열쇠로 집 문을 열고 그 전날 먹다 남긴 냉동 음식이 전자레인지 속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조바심에 3초 일찍 음식을 꺼냈다가 밑바닥이 차가운 채로 음식을 먹는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나는 거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다.


 15년 전 여름이었다. 4살짜리 아이였던 그의 집에서 생일 파티가 열렸었다. 번지 점프 직원과 나도 있었고 우린 모두 3, 4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눈을 감으면 그날 들려왔던 웃음소리들이 파도 소리처럼 잔잔하게 들려온다. 잔디 위를 걷는 발걸음들, 웃는 얼굴들, 햇빛이 스프링클러 아래서 색색 조각으로 부서져 비처럼 내리던 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 비명이 천둥처럼 내리쳤고 모두 뛰쳐나갔다. 어른들은 불안한 마음에 아이들의 손을 잡아 자신들의 다리에 착 달라붙게 끌어당겼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분홍색 신발, 검은색 운동화, 굽 있는 신발, 샌들이 나무처럼 잔디 위로 솟아나 있었다. 그리고 그 숲 너머에 펼쳐진 도로 위에 그가 서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었던 그의 눈은 크게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뒷모습만 봤을 때 동물의 가죽처럼 둥근 모양을 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그때 붉은 눈물이 길을 따라 흘렀다. 나는 비가 내리는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때 역겨운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나는 코를 쥐고 길 위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고함과 당기려는 헛짚은 손들이 뒤에서 스쳐 갔다. 그때 죽어 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눈동자를 크게 뜨고서 속눈썹을 하늘 위로 추켜 올린 채로 그녀는 누워 있었다. 붉은색 스웨터를 입고 검은 길 위에 누워 있었다. 아마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날 그의 표정은 길 위에 누워 있던 여자와 닮아 있었다.


 그는 빨간 스웨터를 입고 검은 도로 위를 걷는다. 하얀 집이 그 모습을 지켜봤고 그 시선을 느낀 그는 뒤돌아 하얀 집을 바라보았다. 아마 15년 전 그는 붉은 스웨터를 입은 여자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붉은색과 검은색과 푸른 밤의 색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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