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것을 꿈꾸는 불완전한 사람들
돌이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삶의 곳곳에 스며있다. 그중엔 유지되는 관계보다 아닌 쪽이 더 많다. 이유는 다양하다.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의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거나, 그저 시간이 흘렀기에 멀어졌거나, 마음의 크기가 같지 않았거나.
내가 가장 아쉽게 여기는 경우는 마지막이다. 마음의 크기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모를 때, 그러니까 관계에 있어서 성숙하지 못했던 시기에 멀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온 날 짐 정리를 하던 중 오랜만에 편지 상자를 열어봤다. 내가 기억조차 못하는 꼬마 시절 엄마가 써준 편지부터 최근에 받았던 마음들까지 모여 있는, 가진 물건 중 가장 소중한 보물 1호라 할 수 있겠다. 그중 이제는 멀어진 친구가 써준 편지를 읽었을 때 착잡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당시의 진심이 온전히 담겨 있지만 지금은 그 친구와 나의 마음 모두 그때와 같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랬다. 마음의 크기가 달라서 멀어졌던 친구를 그리워하며 돌연 내가 지고 있다는 유치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편지는 받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마음의 크기라는 걸 어떻게 잴까. 불변하는 음식, 물건, 영화, 음악 등에 대한 애정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변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의 크기를 잰다는 게 가능은 할까. 측정 주기는 누가 어떻게 정하나. 오차 범위는?
노아 바움백의 영화 <프란시스 하>는 이러한 관계의 굴절을 통과하는 이야기다. 둘도 없는 단짝인 소피와 함께 살고 있는 프란시스는 세계적인 무용수를 꿈꾸는 뉴요커다. 소피와 함께 모든 일상을 공유하는 프란시스에게 그들의 거처인 브루클린의 작은 아파트는 우주이며, 소피는 가난과 무명시절을 견디게 해주는 버팀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는 결혼할 남자가 생겼다며 독립을 선언한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 즈음 프란시스는 남자 친구의 동거 제안을 거절하고 그와 이별했다) 항상 같은 궤에 있다고 여겨졌던 소피의 갑작스러운 이탈은 프란시스에게 거대한 상실감을 준다. 소피와 멀어진 뒤 어색한 사람들과 마주 앉은 저녁 자리, 프란시스는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게 있어요. 파티에서 각자 다른 사람과 얘기하고 웃다가 서로에게 시선이 멈추는 거예요. 거기엔 비밀스러운 세계가 존재하고 있어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리만 아는 세계. 그게 누군가의 관계에서 제가 원하는 거예요."
소피와의 관계에서 상처 받고서도 여전히 이상적인 관계를 꿈꾸는 프란시스의 일장연설을 보고 있노라면 처연하게 느껴질 정도다. 원하는 관계를 만들지 못하고, 꿈에도 닿지 못하는 프란시스가 그 모든 좌절을 딛고 성장하는지를 묻는다면, 글쎄. 그래도 그녀는 살아간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과 사람을 관통하며, 또 수용하면서 그녀는 유연한 춤을 춘다.
사실 이 영화는 어쩐지 내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기울었다. 프란시스의 좌절이 미웠고, 동시에 애틋했다. 관계를 이루는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일 때만 비로소 완벽해진다는 환상은 내게서 없어진 지 오래지만, 이룰 수 없다고 바라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 어려움을 딛고 완벽한 관계가 이뤄졌다고 가정해보자. 뒤따라오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는 어느 누가 확답할 수 있겠는가.
관계에 있어서 성숙한 태도란 이러한 질문들에 잠식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놔두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흐름에 맞춰 적당히 유영하는 것이야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겠다.
프란시스와 소피처럼 급물살에 휩쓸려 멀어진 관계일지라도 그것을 실패라 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두 사람이 함께 했다는 것이다. 결코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내 손에 쥐어진 먼지 쌓인 편지 속 서툰 진심이 그 증거다.
지금의 나는 내가 거쳐온 관계와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어떠한 이유로든 멀어진 많은 이들, 그리고 곁에 남아 있는 이들, 삶을 관통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치열하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