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피니언 섹션에
<이주현의 맛있는 음식 인문학>이란 타이틀로
매달 칼럼을 연재합니다.
음식 속에 담긴 인문학적 이야기를
맛있는 요리와 함께 가볍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20번째 칼럼의 주제는 '국물'입니다.
즐겁게 읽어 주세요 :)
우리는 라면을 "끓인다"고 말하지 "삶는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라면은 면보다 국물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얼큰한 라면 국물이 주는 위안. 뜨거운 국물을 '시원하다'라고 표현하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이다. 한국인의 국물 사랑은 여름에도 계속된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뜨거운 국물 마시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열치열은 오랫동안 검증된 우리 민족의 여름 나기 방식이다. 자연스럽게 국물 요리가 발달해 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반도에서 국물 요리가 발달한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곡물을 주식으로 삼는 농경민족이다. 탄수화물인 쌀밥은 슴슴하고 담백한 맛을 낸다. 여기에 반찬으로 뜨끈하면서 감칠맛 나는 국물 요리는 필수였다.
둘째, 요리에 쓸 만한 물을 구하기 쉬웠다. 유럽의 경우 석회질 때문에 식수로서 물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했다. 유럽에 상대적으로 국물 요리가 적은 것도 이러한 환경적인 영향이 크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마실 만한 물, 즉 단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배고프던 시절 여럿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필요했다. 우리 민족은 고대 시절부터 남다른 식사량을 자랑했다. 적은 음식으로 많이 먹으려면 재료의 양을 불리는 조리법이 필수였을 터. 물을 넣고 끓인 국물 요리가 발달한 이유다.
찌개, 국, 전골… 그 미묘한 차이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찌개를 '조치(助致)'라 불렀다. 한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치는 밥 먹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음식이다. 찌개는 국보다 국물의 양이 적고 건더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보다 간이 세다. 반찬의 역할을 해내기에 거뜬하다. 하지만 뻑뻑한 찜과 비교하면 국물이 넉넉한 편이다. 찌개는 국과 찜 사이에 위치하며 동시에 국과 반찬의 중간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찌개와 전골은 무엇이 다를까.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구분이 쉽지 않다. 전골은 여러 재료를 냄비에 가지런히 담아 즉석에서 끓여 먹는다. 찌개가 국보다 국물의 양이 적지만 전골은 더 적다. 지금은 육수를 넉넉하게 붓고 끓이는 전골 형태가 많아졌다. 하지만 최초의 전골은 육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음식 자체에서 나오는 국물을 먹는 요리였다.
찌개와 전골을 구분 짓는 가장 확실한 차이점은 요리를 먹는 시점이 아닐까. 대체로 찌개는 미리 끓인 후 밥상에 올린다. 반면 전골은 즉석에서 끓여 먹는다. 이런 인식 때문에 찌개는 밥상에 금방 올릴 수 있는 밥반찬으로 여겨진다. 반면 전골은 오랜 시간을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먹는 일품요리의 이미지가 강하다. 찌개와 전골의 상당한 가격 차이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닐까.
양반가에서 즐겨 먹던 맑은 국물 요리
귀한 재료를 사용하여 우려낸 국물 요리는 예로부터 보양식으로 여겨졌다. 날씨가 무덥다고 찬 음식만 먹으면 탈이 나기 쉽다. 이럴 땐 오히려 따듯한 국물 요리로 속을 데우고 기력을 보충하는 것이 좋다. 과거에는 국물 간을 맞출 때 크게 두 가지 맛으로 나뉘었다. 서민들은 쌀뜨물에 된장이나 고추장을 풀어 조리했다. 향이 강하고 맛이 진했다. 반면 궁중이나 서울 양반가에서는 매운맛이나 자극적인 맛을 선호하지 않았다. 젓국이나 소금을 넣고 맑은 국물의 요리를 즐겼다.
삼복더위가 막 지나간 자리에는 아직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다. 이럴 땐 멸치육수와 간장으로 깔끔하게 간을 한 맑은 국물 요리를 밥상에 올려보자. 취향에 맞는 다양한 채소와 고기를 준비하면 끝이다. 살짝 끓이는 전골로도 오래 끓이는 국으로 즐겨도 좋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고기의 핏기를 꼼꼼하게 제거하는 것. 조미료를 최소화했기 때문에 고기의 텁텁한 맛이 더 잘 느껴질 수 있다. 맑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으면 여름 동안 소진됐던 기력이 조금씩 올라올 것이다.
한국일보 사이트에서 칼럼 전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8.17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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