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청각 아카이브 기업 Archipop 탐방기
근대 아카이브는 권리, 권력을 민(民)에게 부여한 가장 상징적인 개념이자 공간입니다.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 실현되었죠. 이후 프랑스는 아카이브 문화가 대중에게 널리 퍼져 있는 ‘아카이브 문화 선진국’으로 각인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일부 번역되는 몇몇 논문이나 도서를 제외하면 아직은 먼 나라 이야기입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일선의 사람들, 그 속에서의 요즘 분위기들, 사용하는 툴이나 프로그램 마음가짐들... 어느 하나 명확히 아는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아카이브 환경이 궁금한 사람들을 위해 아주 일부이지만 직접 방문하고 들어 본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아치팝의 프로젝트는 전국을 아우릅니다. 아치팝의 고객은 공공기관, 레지옹(région) 정부, 종교단체, 연구단체, 학교, 개인 등 다양합니다. 아치팝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의 단체가 적어도 한 개의 주(état) 이상을 관장합니다. 씨클릭의 경우 프랑스 상트발드루아(Centre-Val de Loire) 주 전체에서 활동하고 있죠. 이렇게 여러 지역을 다니며 시청각 자료를 모읍니다. 아치팝은 지역이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고객의 예산을 통해 여러 지역 기업과 협력하여 시민의 아마추어 필름을 모읍니다. 웹사이트로 납품하거나 디지타이징 한 자료와 인덱싱 데이터를 전달하는 식으로 프로젝트 결과를 냅니다.
아치팝이 고객으로부터 예산을 받아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에는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주제, 예를 들어 ‘칼레(Calais) 시의 근현대 예술 역사’와 같은 주제로 범위를 한정합니다. 그리고 그 주제에 해당하는 아마추어 필름, 폭넓게는 전문 필름이나 사진까지도 수집하는 캠페인을 마련합니다. 지역사회가 주도하는 축제나 세미나 같이, 주민이 접근하기 쉬운 이벤트를 통해 장기적으로 수집활동을 홍보합니다. 지역 연구자나 기업과 협업하여 수집하기도 합니다. 가끔 지역 거점 예술가들과 협업하여 전시를 열기도 하고, 작품 활동에 협조하기도 합니다. 시청각 자료를 수집, 보존, 홍보하기 위한 이해관계자 대부분과 함께 활동을 이어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아카이브 고객들은 우리나라보다는 덜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치팝의 전문성과 신의성실에 맡기는 부분이 크다는 건데, 인터뷰를 하면서 이 점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행정기록이 아닌 주민들의 자료 중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기록을 공공기관이 모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레지옹과 같은 정부기관에서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아카이브에 대한 가치평가와 판단기준을 세우는 게 어렵습니다. 따라서 아치팝과 같이 아마추어 필름 분야에 특화된 기업에게 펀딩 하여 이 일을 대신하도록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전문적 판단에 맡기는 부분이 상당합니다. 역사적 가치에 대한 판단도 아치팝이 역사가와의 협의를 거쳐 판단합니다. 아치팝은 필름 한 롤을 인덱싱 하는 데 일주일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건수’나 ‘속도’로 실적을 평가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필름이 얼마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지, 얼마나 신뢰할 만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출연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하여 잘 기술해 두었을 때 프로젝트의 가치와 성과를 인정받습니다.
특히 공공기관에서는 이런 프로젝트를 역사보전과 문화예술 증진의 영역으로 보고 장기적으로 지원합니다. 예산도 들쭉날쭉 항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번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꾸준히 지원받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다만, 요즘엔 프랑스 전역의 공공재정 부족 문제가 심각해 지원이 끊기거나,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됨에 따라 고객이 직접 자체 디지털 아카이브를 관리, 운영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하네요.
아치팝은 지역 축제와 행사에서 부스를 마련하고 사람들에게 일상 아카이브의 가치에 대해 설파합니다. 하루 이틀씩 하는 축제에 이벤트성 부스를 여는 것은 아니고, 중장기적 관점에서 길게는 1년이 넘도록 온오프라인 수집 창구를 열어 놓습니다. 기증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원작자들, 부모님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는 나이 든 자녀들이 대부분입니다. 기증자의 연령대에 맞춰 뉴스나 지역신문에 홍보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고객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요. 잠재 기증자들의 경우 자료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보니 원본이 훼손될까 불안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걸 꺼려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개인들과 접촉해 기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도움과 협조를 많이 받습니다. 마을의 행정가들이 설득에 참여하거나, 지역 연구자가 해당 지역의 아카이브 가치에 대해서 역사적 관점에서 세미나를 열기도 합니다.
지역 거점 기업과 활동하는 것도 엄청난 일입니다. 필름 운송이나 보존, 웹사이트 제작 회사 등 전문적 역량이나 자원, 인프라가 필요한 순간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고 역량을 적절히 분배합니다. 연구역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집 대상지역의 대학과 연계해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시청각 자료에 대한 수집, 분석 결과를 학생과 교수진과 나눕니다. 우리나라에서 아카이브 문화가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반면, 프랑스는 아카이브 사업과 연구 분야에서 다방면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기증자들은 자신이 기록한 시청각 자료에 대한 초상권, 저작재산권과 같은 권리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기증 동의서, 이용 및 공유 허락, 저작재산권 양도양수서 같은 서류를 작성하고 아카이브에 기증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인 시청각 자료들은 사이즈와 수량이 제각각입니다. 여기에 맞춰 기증자별로 투명 상자를 하나씩 마련해 넣어두고 디지타이징부터 시작합니다. 디지타이징이 완료되면 원본과 디지털 사본을 기증자에게 돌려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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