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키비스트J Oct 31. 2024

제2편. 아카이브는 맥락을 가져야 한다.

[로컬 아카이브 시리즈] 잊히지 않는 아카이브를 원합니다.

 아카이브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일까요? 아카이브는 기록을 관리하는 기관, 부서, 또는 기록물 덩어리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이 한 단어에 들어 있다니 의아할 수 있겠습니다.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유래한 라틴어 arche는 시초, 시작, 정부 기관을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정보는 권력이었고,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인 기록은 그래서 정부 기관 서고에 가득 찬 종이로 된 권력 그 자체로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카이브는 단수(archive)일 때 단일 기록물, 복수(archives)일 때는 영구기록물관리기관이 됩니다.


 친숙한 도서와 기록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기록과 도서는 관리 방식이나 쓰임새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유일본과 복본이라는 점입니다. 도서는 수백 권에서 수만 권까지 복본을 대량 생산합니다. 대체로 판매가 목적이어서 시장 논리에 따라 부수가 정해집니다. 기록은 어떤 의도를 통해 만들어지는 행위의 증거물 같은 개념입니다. 따라서 업무나 활동이 발생하면 그와 동시에 생겨나는 자료이기 때문에, 배포할 목적이 없는 이상 유일본이 됩니다.


 두 번째 차이는 의미를 갖는 단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서는 한 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갖습니다. 조지 오웰이 쓴 유명한 소설 <1984>는 전체주의 독재 속 디스토피아를 경고함으로써 독자에게 교훈을 주는, 그 자체로 사회적 영향을 주는 책입니다. 반면에 기록은 한 건으로 큰 의미를 갖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는, 결정적 한 건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기록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건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어서 의미가 있는 그런 부류의 기록은 수사 기록이나 역사 기록 정도입니다. 대부분이 모여 있어야 의미를 갖는 경우입니다. 국가지정기록물로 관리하고 있는 <도산 안창호 관련 미주 국민회 기록물>은 몇 건이나 될까요? 무려 17,000건입니다.


 사실 이런 개념은 생각보다 이해하기 쉽습니다. 내가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매일 오늘의 주제를 정하고, 보름 전 먹은 것, 어제 즐거웠던 것, 오늘 반성한 것을 차곡차곡 기록해 봅니다.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눈을 감고 대충 아무 권을 뽑아서 펼치면, 2024년 8월 18일 먹은 음식이 나옵니다. 이게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미시생활사를 연구하는 누군가에게는, 100년 뒤에야 큰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나의 10년 전 의식의 흐름은 무엇이었는지, 내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10년간 나는 어떻게 성장해 온 것인지… 내 일기 속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할 때 비로소 내 삶이 변화해 온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은 하루치 일기가 아닌 몇 권이라는 덩어리 속에 숨겨진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맥락은 예를 들면, 강서구에 이사 온 내가 지역 청년 활동을 하며 지역을 인식하는 시각을 어떻게 변화시켜 왔는지, 평소 메타인지 훈련을 통해 건강한 정신을 갖고 싶은 내가 매일 어떤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해결했는지와 같은 과정을 일기에 기록함으로써 결국 건강한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나의 다짐과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전체적인 흐름입니다. 이런 맥락을 잘 ‘스토리텔링’ 하면,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서사(narrative)입니다.


 그러므로 아카이브에서는 맥락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몇 권이나 되는 일기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고 맥락을 찾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또 잊어버리기도 쉬우니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는 비효율적인 상황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기 한 장마다 일종의 정보를 정리해 놓습니다. 날짜, 날씨, 작성한 시각, 그날 기분, 일기 제목, 일기의 주제 등… 생각해 보면 초등학생 시절 일기장에 이런 정보를 쓰는 칸이 다 있었음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정보 항목들을 메타데이터라고 하고, 모아 놓았을 때 기록의 맥락을 파악하는 주요 데이터로 씁니다. 요즘 아카이브는 모두 디지털 관리가 기본이기 때문에, 저런 정보만 잘 확보해 놓으면 원하는 주제에 해당하는 일기만을 검색해 볼 수 있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오랜 기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에서 축적되어 그 덩어리만의 맥락이 생겨날 때야 비로소 대체 불가능한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 이 글은 필자가 2024년 8월 강서구 소식지 <방방>에 게재한 원고를 일부 편집, 수정한 글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1편. 잊힌다면, 아카이브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