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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족배동맥 박동 (Dorsalis Pedis Artery Pulse)


 1.
 경찰서와 소방서도 비슷하겠으나 응급실에는 온갖 이상한 전화가 걸려온다. 설날이나 추석 혹은 크리스마스에 '오늘 왜 외래 진료를 하지 않나?'며 항의하고 '내가 2시간 후 갈테니 미리 준비하라'는 황당한 예약 통보(?)도 종종 있다. '좋은 영양제 하나 맞으면 얼마냐?', '응급실에서 수액 맞으며 하룻밤 쉬면 돈을 얼마나 내야 하나?' 같은 문의는 너무 많아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이른 아침 걸려온 전화는 다른 이상한 전화들과 확실히 구별되었다. 전화 건 상대가 119 구급대였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119 구급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람은 응급실 주임 간호사였다. 따라서 내가 직접 통화하지 않았으므로 119 구급대에서 말한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확실히 119 구급대는 응급실 주임 간호사에게 황당한 말을 건넸다. 그들은 '그 병원 근처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으니 병원 직원들이 한번 가주었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교통사고가 발생한 지점은 병원 후문에서 주차장을 지나 200미터 가량 떨어진 주택가 도로였다. 응급실에서 따지면 400-500미터 가량이니 아주 먼 곳은 아니었으나 중증 외상 환자를 현장에서 구조하여 400-500미터 가량 이송할 장비도 없고 응급실 의료진 가운데 전문적으로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다. 교통사고 환자가 중증 외상, 특히 척추 손상이나 심한 개방성 골절 환자라면 휠체어에 태우거나 사람들이 업고 옮기는 방식으로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환자를 현장에서 구조하여 응급실까지 안전하게 이송하는 것이 119 구급대의 임무가 아니었던가? 그때 중년 남자 한 명이 헐레벌떡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사고가 났어요! 사고가 났어요! 어서 구급차 보내주세요!"

 나는 차분하게 그에게 현장에서 병원까지 환자를 안전하게 이송하는 것은 119 구급대의 임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사내는 119 구급대에 신고했으나 도무지 출동하지 않아 병원으로 뛰어 왔다고 얘기했다. 나는 그에게 다시 119 구급대에 신고해서 출동을 서두를 것을 종용하라고 얘기하고 응급실 원무과 직원과 간호사를 사고 현장으로 보냈다. 물론 그들에게 척추 손상이 의심되거나 심한 개방성 골절이 있으면 절대로 훨체어에 태우거나 우리가 이송하지 말고 119 구급대를 기다리라고 얘기했다. 

 다행히 10분 쯤 후 119 구급대가 환자를 데리고 도착했고 현장에 갔던 원무과 직원과 간호사도 돌아왔다.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는 한눈에도 왼쪽 종아리에 심각한 개방성 골절이 있었다. 종아리가 이상한 각도로 꺽였고 침대가 움직일 때마다 기묘하게 덜렁거리는 것이 관찰될 정도였다. 들것을 이용해서 환자를 조심스레 응급실 침대로 옮기고 진찰을 시작했다. 다행히 혈압, 맥박, 체온은 정상 범위였다. 왼쪽 머리에 열상이 있었고 술냄새가 났으나 의식은 비교적 명료했고 동공 반사는 정상이었다. 청진 결과 정상 호흡음이 확인되었고 흉부 압통은 없었고 복부 압통과 복부 강직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골반 역시 통증과 압통이 없었으나 가위로 바지를 찢고 왼쪽 종아리 부분을 확인하자 아주 심한 개방성 골절이 드러났다. 단순한 개방성 골절이 아니라 아예 경골(tibia)과 비골(tibia)이 완전히 어긋나 있었다. 나는 환자에게 엄지발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말했고 다행히 환자는 엄지발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나 환자의 발등 부분을 만져봤을때 족배동맥(dorsalis pedis artery)의 박동이 확인되지 않았다. 아울러 환자의 발은 아주 차가웠고 창백했다. 따라서 환자는 심각한 개방성 골절에도 불구하고 신경은 손상되지 않았으나 동맥 손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쉽게 말해 왼쪽 종아리의 심각한 개방성 골절에도 불구하고 신경은 손상되지 않았지만 동맥이 찢어져 골절된 부분 아래로는 혈액이 공급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신속하게 동맥을 이어주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골절된 부분 아래로 괴사가 발생해서 절단해야할 가능성이 높았다. 우리 병원에서는 그런 식의 혈관 수술이 가능하지 않아 권역 외상센터로 전원해야 하는 사례에 해당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턱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비교적 의식이 명료해으나 뇌출혈 여부를 확인해야 했고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기흉(pneumothorax)이나 혈흉(hemothorax)이 있다면 흉관삽입술(thoracostomy) 같은 시술을 시행하고 보내야 했다. 그래서 즉시 Brain CT와 흉부, 골반, 왼쪽 종아리에 대한 X-ray를 시행했다. 다행히 뇌출혈은 관찰되지 않았고 기흉이나 혈흉 혹은 골반 골절도 확인되지 않았다. 나는 개방성 골절을 입은 환자의 왼쪽 종아리를 드레싱하고 부목으로 고정한 후 권역별 외상센터에 연락해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권역별 외상센터에서는 응급수술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연락하겠노라 대답했고 다행히도 5분 후 응급수술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와서 환자를 전원했다. 

 환자를 태우고 사라지는 앰블런스를 바라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물론 엄밀히 말해 기시감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10년 전에도 유사한 환자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2.
 레지던트 1년차 무렵인지 2년차 무렵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휴일이었던 것은 분명하나 토요일이나 일요일이었는지 혹은 다른 공휴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 내가 선택한 행동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2년차 무렵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는데 환자는 교통사고로 부상입은 젊은 남자였다. 사고 난 시점은 오전을 지나 막 오후로 집어드려는 무렵이었고 다행히 생명이 위험한 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환자는 발목 부분에 심한 개방성 골절이 있었다. 다행히 Brain CT와 복부 CT 그리고 다른 X-ray에서 별다른 이상이 관찰되지 않아 나는 정형외과 당직 레지던트를 호출했다. 레지던트 2년차 무렵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응급실에서 이른바 '말발'이 강하지 못했다. 물론 2년차 후반부터는 필요하다면 다른 임상과 교수라도 언제든 들이박는 '똘아이' 혹은 '싸이코'로 등극했으나 '미치광이 싸움꾼'일지는 몰라도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는 아니었기에 감당할 수 없는 일이나 굳이 필요하지 않은 싸움은 피했었다. 그래서 그때도 정형외과 당직 레지던트에게 '혈관 손상이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족배동맥(dorsalis pedis artery)을 확인해보라'고 얘기하는 것 이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원래 당시 수련받던 병원의 정형외과는 어떡하든 환자를 다른 임상과로 넘기려는 습성이 있어 당연히 휴대용 도플러 초음파 기계를 가져와서 족배동맥의 혈류를 확인하고 혈류 상태가 나쁘면 혈관외과(당시 수련받던 병원에서는 일반외과가 혈관외과를 담당했다)를 호출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형외과 레지던트들은 족배동맥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부목을 만들고 교수에게 연락하고 자기들이 응급수술하겠다며 수술방까지 잡았다. 그러다가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 갑자기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형, 이거 일반외과 봐야해요. 족배동맥에 박동이 없어요. 혈관손상이라 그것부터 수술해야 해요."

 앞서 말했듯 혈관손상은 빠른 수술이 중요하다. 찢어진 혈관 아래로는 혈액이 공급되지 않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손상이 진행되고 괴사된다. 그렇게 된 후 혈관을 다시 연결해봐야 아무 의미없고 결국 괴사된 부분을 절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지난 후에 갑자기 '족배동맥에 박동이 없어요'라니! 그래도 일단 일반외과에 연락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반외과에서 '수술 불가'란 판정을 내렸다. 표면적으로는 '혈액이 공급되지 않은 시간이 길어서 수술의 의미기 없다'였으나 실제 이유는 달랐다. 집도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혈관 접합 수술이 가능한 일반외과 교수는 2명이었는데 한 명은 학회에 참석하러 다른 지역에 있었고 당직으로 병원 근처에 있어야 하는 교수도 상당히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일반외과와 정형외과가 내린 결론은 '발목 아래 절단'이었다. 

 '노인은 함부로 해도 괜찮다'는 뜻은 아니나 나이 많은 당뇨족(DM foot) 환자의 발을 절단하는 것과 건강한 20대 남자의 발목을 절단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다. 특히 환자는 그날 결혼식 올린 신랑이었다. 이미 시간이 늦어 혈관 접합 수술이 큰 의미 없을 수도 있으나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절단하는 것은 옳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인근 병원들에 혈관 접합 수술이 가능한지 문의했고 한 곳에서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민 끝에 나는 환자를 그곳으로 전원했다. 

 나중에 확인한 결과에 의하면 혈관 접합 수술은 성공했다. 조직 손상도 상당부분 회복했으나 환자의 발가락은 이미 괴사되어 절단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확히는 딱 발가락이 아니라 좀더 절단했으나 발가락과 주변을 제외하면 발의 대부분을 살릴 수 있었다. 

 당연히 보호자들은 병원에 항의했다. 최종적으로 소송까지 갔는지 알 수 없으나 고객만족팀과 총무팀이 한동안 바빴다. 그러면서 '배신자가 누구냐?'는 얘기가 나왔다. 

 곰곰히 따져보면 환자를 수술 가능한 병원으로 전원시킨 내가 배신자일 수 밖에 없으나 다행히 그때까지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응급의학과의 조무래기 레지던트'에 불과했다. 그 무렵에도 '적어도 나는 열심히 일하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겠다'며 자질구레한 사건사고를 일으켰으나 아직까지는 '배신자'로 지목당할 존재감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 후로 레지던트 시절 '조직의 논리'와 '환자의 이익'이 부딪혔을 때 그리고 '의사집단의 관습적 규율'과 '나의 양심'이 부딪혔을 때 어떤 선택을 내릴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똘아이, 싸이코, 미치광이 싸움꾼일지는 몰라도 현실 감각 없는 순진한 몽상가는 아니다. 나를 불살라 정의를 밝히는 어리석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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