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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Aug 06. 2019

응급실 일기

완전 실어증(Global aphasia)


 1.
 "앞으로 자주 보는 일은 없어야죠."

 환자가 응급실을 나서며 '수고했습니다' 혹은 '감사합니다'고 인사하면 내가 종종 건네는 말이다. 식당, 은행, 서점 같은 장소라면 '자주 들르세요', '앞으로도 종종 뵈어요' 같은 말이 무난하고 친근한 인사가 되겠으나 같은 내용의 말을 응급실에서 건네면 저주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앞으로 자주 보는 일은 없어야죠'라는 바램과 달리 몇몇 환자들은 자주 접할 수 밖에 없다. 심한 당뇨병, 만성폐질환, 심한 심장질환, 만성 신부전, 간경화, 누워 지내는 뇌병변 환자가 그런 사례인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응급실에서의 만남을 반복하며 점진적으로 상태가 악화된다. 그런데 가끔씩 불과 얼마 전 진료했던 환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응급실을 방문한다.  

 이른 아침 응급실을 찾은 그 환자도 그랬다. 119 구급대의 이동식 침대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올 때부터 환자는 오른쪽 팔과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못해 부자연스러운 자세였다. 단순히 자세가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환자는 스스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는 '명료한 의식 상태(alert mentality)'에도 불구하고 주변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환자를 응급실 침대에 옮기고 측정한 혈압, 체온, 맥박은 정상범위였다. 저혈당(hypoglycemia)을 감별하기 위해 측정한 혈당 역시 150 정도였다. 그러나 강한 통증을 주어도 오른쪽 팔과 다리는 움찔거릴 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명료한 의식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기가 어딘가요?' 같은 질문에 전혀 대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의미 없는 단어조차 내뱉지 못했다. 또 '팔을 들어보세요', '제 말이 들리면 눈을 감아보세요', '다리를 한번 움직여보세요' 같은 말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말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듯 했다. 

 일반적으로 기질적 실어증(organic apahsia)은 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뇌병변이 원인이다. 이런 기질적 실어증은 다시 운동성 실어증(motor aphasia), 이른바 브로카 실어증(Broca's aphasia)과 감각성 실어증(sensory aphasia), 소위 베르니케 실어증(Wernicke's aphasia)으로 나누어진다. 운동성 실어증은 뇌의 언어중추에서 '브로카 영역'이라 불리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 타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나 환자가 말을 하지는 못하는 질환이며 감각성 실어증은 뇌의 언어중추에서 '베르니케 영역'이라 불리는 부분에 문제가 생겨 말을 할 수 있으나 타인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질환으로 의미없는 기괴한 말을 내뱉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 모두 좌뇌에 위치하고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며 혈액을 공급받는 혈관도 비슷해서 실제로 교과서적인 '브로카 실어증'이나 '베르니케 실어증'은 드물다. 다시 말해 타인의 말을 잘 이해하나 스스로 말할 수 없어 슬퍼 보이는 환자와 말하는 기능은 정상이나 이해하는 기능이 결여되어 정상적인 단어가 아닌 기괴한 말을 쉴새없이 내뱉는 환자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한쪽 기능이 더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나 나머지 기능도 정상이 아닌 경우가 많고 때때로 두 가지 기능 모두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완전 실어증(global aphasia)도 있다. 환자는 안타깝게도 바로 완전 실어증에 해당했다. 그리고 우뇌는 몸의 왼쪽 운동능력을 담당하고 좌뇌는 몸의 오른쪽 운동능력을 담당하는 것을 감안하면 완전 실어증과 함께 오른쪽 편마비(hemiplegia)가 나타났으니 환자는 왼쪽 뇌에 심각한 뇌병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뇌경색(cerebral infarction) 가능성이 보다 높았으나 일단 뇌출혈(acute brain hemorrhage)부터 감별해야해서 Brain CT를 처방했다. 그리고는 보호자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발병 시간을 계산했다. 혼자 사는 환자는 내원 하루 전 저녁 10시 보호자들과 마지막으로 통화했고 내원일 새벽 5시 거실에서 쓰러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그러니까 발병 시간은 하루 전 저녁 10시부터 당일 새벽 5시 사이의 어딘가였다. 뇌출혈에서도 중요하나 뇌경색의 경우 발병 후 얼마나 시간이 경과했는지는 아주 중요하다. 3-6시간 이내 도착해야 강력한 혈전용해제 사용을 고려할 수 있고 뇌혈관조영술을 통해 막힌 혈관을 물리적으로 뚫는 것도 12시간 이상 경과하면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환자가 응급실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6시였으니 뇌경색이라면 혈전용해제 투여는 위험하나 뇌혈관조영술은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었다. 예상대로 환자의 Brain CT에서는 뇌출혈이 확인되지 않았다. 대신 좌뇌의 후두엽(occipital lobe)에 과거 뇌경색을 앓은 흔적으로 보이는 광범위한 손상이 관찰되었다. 물론 현재 증상과 관련 가능성이 극히 낮은 만성 병변(old lesion)이었으나 그 Brain CT가 아주 낯익게 느껴졌다. 환자가 내원한 직후 간략하게 과거 의무기록을 확인해서 환자에게 협심증(angina 심장의 관상동맥이 좁아지는 질환)이 있으며 우리 병원 심장내과에서 심혈관조영술을 받고 아스피린과 플라빅스(plavix)를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나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좌뇌 후두엽에 광범위한 손상이 있는 Brain CT는 분명히 이전에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의무기록을 보다 자세히 살펴봤고 환자가 몇 달 전 응급실을 방문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때 환자는 명료한 의식 상태로 내원했고 신경학적 검사에서도 어둔한 발음이나 근력 저하 같은 문제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오른쪽 팔이 저린다고 호소했고 혈압이 210/120으로 아주 높았다.  그때 나는 혈압강하제인 라베신(labesin) 20mg을 정맥 주사로 투여하고 Brain CT를 시행했다. 그렇게 확인한 Brain CT에서 좌뇌 후두엽의 광범위한 손상을 발견했으나 급성 병변이 아니라 오래 전 뇌경색을 앓은 흔적이었고 라베신 정맥주사 후 혈압이 130/80으로 하강하며 오른쪽 팔이 저린 증상도 사라졌다. 정상 혈압으로 감소하며 증상이 사라진 것으로 미루어 고혈압성 뇌병증(hypertensive encephalopathy)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일시적으로 뇌혈관이 막혔다가 풀리는 일과성 허혈성 발작(TIA, transient ischemic attack) 가능성도 있었으나 증상이 소실되엇고 이미 심장내과에서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복용하고 있어 추가적인 경구약 처방이 필요하지 않았다. 덧붙여 환자는 최근 오른쪽 팔이 저린 증상이 자주 있어 다음날 신경외과 외래 진료가 예악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꼭 신경외과에 들러 예악된 진료를 할 것을 권유하고 고혈압성 뇌병증과 일과성 허혈성 발작을 감별하기 위한 추가 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당연히 환자는 다음날 신경외과 외래를 방문했다. 다만 신경외과에서는 '과거 뇌병변이며 현재 증상이 없다'고 특별한 검사나 치료없이 환자를 심장내과 외래로 보냈다. 그리고 몇 달 후 환자는 이전과 달리 완전 실어증과 오른쪽 편마비 증상으로 응급실에 실려왔다. 

 사실 몇 달 전 혈압이 상승하고 오른 팔이 저린 증상은 고혈압성 뇌병증일 수도 있었고 일과성 허혈성 발작이라고 해도 이미 아스피린과 플라빅스를 복용하고 있으며 증상이 소실되었으니 다음날 신경외과 외래에 들러 예약된 진료를 하고 Brain MRI를 찍도록 하는 것이 비합리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나아가 '과거 뇌병변이며 현재 증상이 없다'고 Brain MRI를 시행하지 않은 신경외과 의사의 판단 역시 문제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환자는 몇 달 후 심각한 뇌경색 증상을 보이며 실려왔다. 나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환자에게 Brain MRI를 시행하고 신경과 당직의사를 호출했다. 

 예상대로 그리고 안타깝게도 환자의 Brain MRI에서 급성 뇌경색 병변이 관찰되었다. 특정 분위에 국한된 뇌경색이 아니라 왼쪽 측두엽, 왼쪽 뇌실 주변 영역, 오른쪽 전두엽에 다발성 뇌경색이 있었고 왼쪽 중뇌동맥(left middle cerebral artery)이 완전히 막혀 있었다. 왼쪽 중뇌동맥의 완전 폐색은 완전 실어증과 오른쪽 편마비에 부합되는 병변이었다. 왼쪽 측두엽, 왼쪽 뇌실 주변, 오른쪽 전두엽에 발생한 다발성 뇌경색은 환자의 증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으나 환자에게 특정 뇌혈관의 문제 뿐 아니라 심장이나 다리의 심부 정맥 같은 곳에 큰 혈전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해서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도 왼쪽 중뇌동맥이 완전히 막혔으나 MRI 화면에서 아직 왼쪽 중뇌동맥이 혈액을 공급하는 부분에 심각한 변화가 확인되지 않아 막히고 시간이 얼마 경과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뇌혈관조영술을 시행해서 막힌 왼쪽 중뇌동맥을 뚫어볼 수 있었다. 그때 신경과 당직의사가 응급실에 도착했고 그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보호자 역시 뇌혈관조영술에 동의했다. 

 2.
 결국 환자는 우리 병원에서 뇌혈관조영술을 받지 못했다. 뇌혈관조영술은 일반적으로 우리 병원에서 시행하는 시술이나 하필이면 그날 시술하는 의사가 휴가였다. 다행히 환자는 신속하게 인근 대학병원으로 전원되었다. 그래서 나는 환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뇌혈관조영술을 시행할 수 있었는지, 시행했다면 성공했는지, 얼마나 회복되었고 어떤 후유증이 남았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완전 실어증은 대단히 무서운 질환이다. 언뜻 생각하면 '언어 기능'이 사라졌다고 무슨 큰 문제가 생기겠나 싶을 수도 있다. 당장 죽는 질환도 아니다. 그러나 완전 실어증은 운동 실어증과 달리 단순히 말하지 못하거나 말이 어둔한 것이 아니라 아예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질환이다. 다시말해 그냥 '벙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타인의 말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상태, 철저히 고립된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굳이 인간이 사회적 존재란 것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그런 식의 고립은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덧붙여 언어 능력은 인간의 추상적인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언어 능력이 완전히 소실된 인간은 추상적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렇게 추상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 과연 자신만의 독특한 자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특징을 유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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