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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경훈 Nov 30. 2019

응급실 일기

위으키! 위스키!


1.
동아프리카 고원이나 야트막힌 산지가 있는 아라비아 반도의 목동에게 특정 열매를 먹은 염소가 한동안 아주 활기 넘치는 것은 자주 목격되는 평범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선뜻 그 열매를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다가 유달리 호기심 많은 목동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열매를 맛보았을 것이다. 자그마한 열매는 두껍지 않은 과육과 딱딱한 씨앗으로 이루어 졌고 과육의 맛은 크게 나쁘지 않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염소와 달리 목동은 별다른 활기를 느끼지 못했다. 실망한 목동은 남은 열매를 모닷불에 던졌는데 잠시 후 이전에는 맡지 못한 독특한 향기가 주변에 퍼졌다. 다시 호기심을 느낀 목동은 과육은 타버리고 그을린 씨앗만 남은 열매를 꺼내 조심스레 씹어봤을 것이다. 쓴 맛이 느껴졌으나 뱉고 싶은 충동 대신 씁쓸하나 계속 씹고 싶은 맛이었다. 곧 머리가 맑아지고 세상이 또렸하게 보이며 손가락 끝에서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목동들은 맹수로부터 염소와 양을 지켜야 하는 밤이면 그 열매의 씨앗을 불에 그을린 다음 씹었을 테고 시간이 흐르자 그을린 씨앗을 돌로 으깬 후 뜨거운 물에 타서 마셨을 것이다.

확실히 단정할 수 없으나 '커피의 발견'은 이런 과정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커피를 발견한 목동은 한 명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명의 '유일한 발견자'가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지역에서 적지 않은 사람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커피를 약초 혹은 기호품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지역이 에티오피아와 예멘이란 것은 확실하나 정확히 어느 지역이 진짜 '커피의 고향'인지 확정하기는 어렵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동시다발적 발견'은 드물지 않다. 커피와 함께 기호품으로 손꼽히는 술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발견되었을 것이다. 포도와 사과처럼 다량의 당분이 함유된 과일이 땅에 떨어져 인간과 짐승이 손대기 힘든 위치에 자리 잡는다. 온도와 습도가 적절하고 공기 중 떠다니는 많은 미생물 가운데 운좋게 특정 효모가 흘러오면 그때부터 발효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발효되어 에틸 알코올이 아세트산으로 변하기 전, 향긋한 냄새에 끌린 인간이 두려움과 호기심 가운데 호기심을 선택하여 그 액체를 맛본 것이 '술의 발견'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커피의 발견이 에스프레소 머신의 발명까지 이어지듯 술의 발견도 복잡한 발전 과정을 거친다. 일단 인간은 효모를 사용한 발효법을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포도와 사과처럼 원래 당도가 높아 발효에 적합한 과일 뿐 아니라 쌀, 밀, 보리처럼 자연 상태에서는 효모로 발효시키기 힘든 곡식도 끓여 걸쭉한 액체로 만든 다음 발효시켰다. 그러나 포도주든, 사이다든, 맥주든, 막걸리든, 니혼주든 발효주는 알코올 농도를 일정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 발효 과정에서 에틸 알코올을 만드는 효모도 미생물이라 어디까지나 효모 자신이 죽지 않는 범위에서 에틸 알코올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독한 술을 만들지 못하는 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술의 보관과 운송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게 했다. 또 그렇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도 일정 기간 이상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시간이 지나면 에틸 알코올이 아세트산으로 변해, 쉽게 말해 술이 식초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증류법의 발명'을 통해 해결되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고 에틸 알코올은 78도 쯤에서 끓는다. 그래서 발효주를 가열하면 물보다 에틸 알코올이 먼저 증기로 바뀐다. 따라서 발효주를 가열해서 나오는 증기를 모은 다음 식혀 다시 액체로 만들면 발효주보다 에틸 알코올 농도가 훨씬 높은 술이 된다. 물론 이런 증류 과정은 상당히 위험하다. 발효주를 끓일 때 나오는 증기는 에틸 알코올 함량이 높아 조그마한 부주의도 자칫하면 폭발이나 화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업혁명과 대항해시대 후 노동자와 선원이 마시는 술인 '진(Gin)'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런던 빈만가에 증류소가 난립했고 그런 난립은 빈번한 폭발 사고와 화재로 이어졌다.

어쨌거나 커피와 술은 막 발견했을 때부터 인간을 매혹시켰다. 과육을 제거하고 씨앗을 대충 불에 그을린 다음 부수어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원시적 방법으로도 커피는 '천사의 선물'이란 찬사와 '악마의 음료'란 비난을 동시에 받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코코넛즙이나 카사바 반죽에 침을 뱉어 발효시키는 원시적인 술도 뿌리치기 힘든 유혹인데 사실 진짜 '악마의 음료'는 커피가 아니라 술이다.

2.
사내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심한 빈혈(anemia) 환자의 창백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햇볕을 접하지 않은 사람, '지하 생활자'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창백함에 해당했다. 창백한 피부와 달리 눈의 흰자위에는 핏발이 잔뜩 섰고 노르스름했다. 상의는 속옷, 하의는 파자마 차림이었는데 팔과 다리가 앙상하고 속옷과 파자마 틈으로 드러난 몸통도 볼품없이 빈약했다. 눈은 잔뜩 핏발 서고 노르스름하나 사람들과 시선을 맞추고 응급실 침대에 누워서도 주변을 살펴보는 것으로 미루어 의식은 비교적 명료했다. 덧붙여 간호사가 혈압을 측정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로 양 팔을 심하게 떨었다.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무엇이 며칠이나 지났는지 생략한 질문에도 환자는 정확하게 대답했다.

"사, 사흘, 사흘째에요. 사흘째."

간호사가 측정한 혈압과 체온, 호흡수는 정상 범위였고 맥박은 분당 110회로 다소 빨랐다. 나는 환자에게 다가가 흰자위를 확인했다. 실내 조명이 만든 착시가 아니라 환자의 흰자위는 확실히 노란 색이었다.

"3일 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엄밀히 말하면 마시지 못한 것 아닙니까? 자발적인 의지로 술을 끊으려 한 것이 아니라 몸이 너무 아파 술을 마시지 못했죠?"

환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습니다. 몸이 안 좋아 술도 못 먹겠더라구요."

나는 환자의 머리에 최근에 생긴 외상 흔적이 있는 지부터 살피면서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매일 술을 마셨습니까?"

환자의 대답은 나도 예상할 수 없는 수위였다.

"그, 그러니까 열 여섯부터 매일 마셨어요."

3.
명료한 의식, 체온과 혈압은 정상 범위, 그러면서 황달이 완연히 관찰되는 알콜 의존증 환자란 것을 확인한 후 머리에 최근에 생긴 외상 흔적이 있는 지부터 살펴본 이유는 경막하 출혈(subdural hemorrhage) 가능성 때문이다. 대부분 외상성 뇌출혈에 해당하는 경막하 출혈은 와파린(warfarin)처럼 혈액 응고 기능을 떨어뜨리는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에게 자주 발생하는데 심한 간경화 환자도 혈소판 숫자가 감소하고 혈액 응고 기능이 떨어져 위험군에 속한다. 특히 알콜성 간경화 환자는 술취해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혀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아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환자는 이마에 상처가 있었지만 부딪힌 것도, 넘어진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행히 CT 결과 경막하 출혈 같은 이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혈액검사 결과는 엉망이었다. 빈혈을 반영하는 혈색소(hemoglobin) 수치는 11로 확인되어 12-16 사이가 정상임을 감안하면 크게 낮지 않았고 백혈구 수치는 정상 범위였으나 혈소판 수치는 19,000에 불과했다. 혈소판 수치는 150,000-400,000 사이가 정상 범위이며 50,000 이하로 감소하면 출혈에 주의해야 하고 20,000 아래로 떨어지면 출혈 여부와 관계없이 혈소판 수혈이 필요하다. 또 간효소수치(hepatic enzyme)는 70-80 정도로 소량 증가했으나 황달을 나타내는 빌리루빈(bilirubin) 수치는 10에 가까웠다. (간효소수치의 정상 범위는 40 이하, 빌리루빈 수치의 정상 범위는 1 혹은 1.5 이하) 언뜻 '빌리루빈 수치는 높지만 간효소수치라도 낮아 다행이다'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빌리루빈 수치는 높고 간효소수치는 비교적 정상에 가까운 것은 매우 나쁜 상황이다. 간질환에서 빌리루빈 수치는 현재 간기능이 얼마나 저하되었는지를 반영하고 간효소수치는 지금 간이 얼마나 파괴되고 있는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높은 빌리루빈 수치와 비교적 정상에 가까운 간효소수치'는 '이미 간이 대부분 파괴되어 더 이상 파괴될 간이 남아 있지 않고 간기능 자체는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나마 혈액검사에서 대사성 산증(metabolic acidosis)이 확인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사성 산증이 있다면 출혈(심각한 출혈과 탈수에서도 대사성 산증이 나타난다) 혹은 알콜성 케톤산증(alcoholic ketoacidosis)이 동반했을 가능성이 큰데 환자의 상황에서 그런 합병증은 '눈 앞에 다가온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환자는 심한 알콜 의존증에 해당합니다. 또 지속적인 알콜 남용으로 심각한 간질환이 발병했습니다. 하얀 색이어야할 흰자위가 노랗게 변한 것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을 만큼 황달이 심합니다. 물론 간효소수치는 정상 범위에 가깝습니다만 그것은 아주 나쁜 뜻입니다. 간효소수치는 간세포가 손상받아야 높아지는데 환자는 이미 간이 대부분 파괴되어 더 이상 손상받을 간세포가 없어 간효소수치가 정상 범위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간 기능 저하를 나타내는 황달 수치는 정상보다 열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혈소판 수치마저 아주 낮습니다. 혈소판 수치는 15만에서 40만 사이가 정상이고 5만 이하로 감소하면 갑작스레 출혈이 발생할 수 있는데 환자의 혈소판 수치는 19,000에 불과합니다. 아주 작은 충격에도 심각한 출혈이 발생할 수 있고 아예 충격이 없어도 위나 식도에서 지혈 불가능한 출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환자는 아직 젊고 겉으로는 당장 돌아가시지 않을 것처럼 보이나 갑작스레 사망할 가능성이 다분한 상황입니다. 일단 정확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복부 CT를 시행하고 중환자실로 입원해서 치료를 진행하겠습니다. 내일 쯤에는 위내시경을 시행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간질환에서는 위식도 정맥류라고 위와 식도의 혈관이 부풀어 오르는 합병증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 병원 소화기내과로 입원해서 치료할 수 있는 사례에 해당했다. 물론 예후가 좋지 않겠으나 당장 대학병원 응급실로 전원해도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제야 도착한 보호자가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대학병원으로 갈 수 있을까요?"

나는 재차 우리 병원에서 치료 가능한 사례에 해당하고 대학병원으로 전원해도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으며 무턱대고 전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병원에 전원 문의해서 수용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야함을 설명했다. 그래도 보호자는 완강히 대학병원 전원을 원해 전원 문의 전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학병원에서는 '응급실에서 수일 간 머물러야할 가능성이 높으나 진료 자체는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나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대학병원의 답변 내용을 통보했는데 그래도 그들은 전원을 원했다.

4.
커피와 달리 술은 많은 문제를 만든다. '술과 담배는 국가가 공인한 합법적 마약'이란 술자리 농담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아주 가까운 가족 가운데 심각한 알콜 의존증 환자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정작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한 경각심을 가지지는 못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응급실에서 일하는 것은 대부분이 머리로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느끼지 못하는 문제를 아주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는 기회다. 며칠 밤만 응급실에서 일해도 술이 만든 온갖 문제와 마주할 수 있다. 물론 혈소판 수치가 19,000에 불과한 환자는 가운데서도 보기 드물게 강렬한 사례에 해당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술은 해결하기 쉽지 않다. 세상 모든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파악하는 부류는 '그러니까 술을 금지하자'고 목소리 높이겠으나 성경을 든 경건한 사람들이 술집을 때려 부수고 거기서 일하는 음탕한 여인들을 끌어내며 시작한 20세기 초반 금주법의 결말은 '폭력 조직의 번영'이었다.

덧붙여 응급의학과 의사로 10년 넘게 일하며 술이 만든 문제를 수도 없이 지켜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스키 애호가이며 증류주 매니아다. 물론 애호가 혹은 매니아가 중독자와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독자가 되면 더 이상 애호가 혹은 매니아라고 부를 수 없다. 중독자는 위스키, 브랜디, 럼 같은 술이 지닌 독특한 향과 미묘한 맛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누구보다 예민한 혓바닥과 세련된 취향을 지녔더라도 중독자가 되는 순간부터는 단순히 알코올 자체만을 탐닉할 뿐이다. 그러니 술은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마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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